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①]
어린시절
나는 우리 부모님이 거제도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중인 1952년, 거제도의 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이던 부모님께서 1950년 12월의 ‘흥남 철수’ 때, 잠시 난을 피한다는 심정으로 별다른 준비도 없이미군 선박에 몸을 싣고 떠난 피난길이 거제도까지 이어질 줄은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온통 눈 덮인 순백의 고향 풍경과는 너무도 다르게 ‘따뜻한 남쪽 나라’ 거제도는 푸른 보리밭이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땅이었고, 어머니는 그 풍경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더라고 몇 번이나 되뇌고는 했다. 따뜻한 날씨만큼이나 푸근했던 거제도 인심 덕분에 부모님은 간신히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3주 정도 예상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야말로 맨손이나 다름없이 고향을 떠나온 부모님 앞에는 뿌리 잃은 고단한 삶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흥남의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에서 수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 함경도 지역의 명문이던 함흥농고를 졸업하고 흥남 시청 농업계장을 지내던 아버지가 피난지 거제도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포로수용소의 노무일 말고는 달리 없었다. 어머니도 살림을 도와 계란을 떼어다가 어린 나를 업은 채 부산까지 건너가 파는 고달픈 행상 일을 했다. 이렇게 조금씩 모은 돈으로 우리 일가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맞추어 부산 영도로 이사를 했다. 커다란 배에서 내려 누렇게 익은 조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조밭을 지나 이사 갈 집으로 향하던 풍경이 내 어린 날의 기억으로 지금껏 가슴에 남아 있다.
교사나 공무원을 하면 맞을 아버지가 성격에도 어울리지 않는 장사를 시작하셨지만 잔뜩 빚만 지고 손을 털고 말았다. 받을 돈은 받지 못하면서 갚아야 할 돈은 끝내 갚느라 오랫동안 허덕였다. 아버지는 이 장사의 실패를 끝으로 무너지고 말았고 끝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대신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어머니 역시 별 뾰족한 수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탄 배달을 한 적도 있었다. 나도 그 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는데 연탄 검댕을 묻히며 리어카를 끄는 일이 창피해 툴툴거리는 바람에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일쑤였다. 외려 어린 동생이 묵묵히 도왔다. 한번은 연탄을 잔뜩 싣고 언덕길을 내려가다가 뒤에서 잡아 주고 있던 어머니가 힘이 달려 손을 놓치는 바람에 리어카가 길가에 처박힌 적이 있었다. 크게 다친 데도 없었고 다만 연탄이 좀 깨졌을 뿐인데, 이 일로 크게 상심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라 호 태풍 때에는 지붕이 홀랑 날아가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때 하필 아버지는 장사를 나가 계셔서 집에는 어린 우리들과 어머니뿐이었다. 거센 바람에 부엌문의 경첩이 빠져 삐걱거렸지만 우리 힘으로는 그 문을 온전히 지켜내기란 역부족이었다. 부엌문이 떨어져버리자 왈칵 밀려든 바람은 온 집을 팽팽하게 부풀리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루핑 지붕을 밀어 올려 홀랑 날려버렸다. 그 지붕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찾을 수도 못했다.
영도의 신선성당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구호물자를 나눠주었다. 학교를 마치고 양동이를 들고 가 줄서서 기다려 배급받곤 하던 강냉이 가루며 전지분유는 끼니 해결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나는 그 일이 몹시 싫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야말로 장남의 노릇이라 내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꼬마라고 수녀님들이 사탕이나 과일을 손에 쥐어 주기도 했는데 어린 눈에는 수녀님들이 천사인 것만 같았다. 이런 고마운 인연으로 어머니가 먼저 가톨릭에 입교를 하셨고 나도 3학년 때 영세를 받았다. 나는 훗날 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어머니는 지금도 그 성당에 다니고 계신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②]
자전거
가난에서 비롯된 결핍감 못지않게 가난이 나를 가르친 것도 무척 많았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은 독립심이었다. 웬만한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것, 힘들게 보여도 일단 혼자 해결하려고 부딪혀 보는 것,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긴 인생을 통 털어 볼 때 참으로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제일 중요한 건 아니다’라는 가치관은 나로 하여금 가난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을 주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갖지 못한 물건들과 하지 못한 많은 일들, 그러한 결핍이 가져다주는 아쉬움이 왜 없었겠는가. 돈이 드는 일은 애당초 내 몫이 아니란 자각 때문에 말도 꺼내보지 못한 일들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내 자전거를 갖는 것은 고사하고 푼돈을 내고 빌려 타는 것도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 자전거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SBS의 힐링 캠프에 출연했을 때 이 사연이 알려져 나는 제작진으로부터 자전거 한 대를 선물로 받았다. 4.11 총선 당시 나는 그 자전거를 사상의 선거 사무실에 갖다 놓았는데 커다란 선거 벽보 앞에 놓인 자전거 앞에서 많은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곤 했다. 소위 그럴싸한 포토 존이 된 것이다. 자원봉사자들은 그 자전거에 바람개비를 달아 장식해 주었다. 그 자전거를 타고 바람개비를 힘차게 돌리며 맘껏 달리는 상상을 하면 언제나 가슴이 설레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③]
문제아
나는 과외수업 같은 것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지만 무난히 부산의 명문 경남중학교에 합격했다. 아버지께서 국제시장 안의, 고향사람이 운영하는 교복맞춤집에서 교복을 맞춰 주시며 아주 자랑스러워하시던 모습이 그립게 떠오른다.
빈부의 격차가 확연한 경남중학교의 분위기 속에서 처음으로 세상의 불공평함과 그로 인한 위화감을 피부로 느꼈다. 점차 학교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우리나라 소설에서 시작된 독서는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서 <사상계> 같은 사회 비평적 잡지와 야한 소설에 이르기까지, 독서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사회와 인생을 알게 되었고 기초적인 사회의식도 갖추게 되었다. 자연히 공부는 뒷전이었다. 훗날 대학 입시 때 공부를 소홀히 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대신 나의 내면을 성장시키고 건강한 사회의식을 갖게 됐으니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중, 고등학교 때 내 별명은 ‘문제아’였다. 물론 처음엔 이름 때문에 생긴 별명일 뿐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 사회에 대한 반항심도 생기고 고 3때엔 술 담배도 하게 되었다.
또 소위 ‘노는 친구들’과도 어울리면서 폭넓게 친구들을 사귀어 가는 과정에서 실제로 정학을 먹기도 했으니 정말 문제아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는 3선 개헌 반대 시위, 학교를 병영화 하려는 교련에 대한 항의 등을 계기로 크게 높아진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을 가슴에 담은 ‘정의파’라는 자의식이 더 강했던 게 아닌가 싶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④ ]
학생운동에 뛰어들다
나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학과를 가기엔 높은 점수가 아깝다는 매우 ‘비학문적’인 이유로 반대하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 법대로 진로를 바꿨다.
3학년으로 올라가자 대학가의 유신반대 열기는 날로 고조되었다. 긴급조치가 연이어 발효되었고 민청학련사건, 인혁당 사건 등이 터졌다. 이렇다 할 학생운동이 없던 경희대에서도 가을에 접어들자 재단 퇴진 농성을 계기로 유신 반대 시위가 계획되었다. 나는 이 시위에 필요한 선언문을 작성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1975년으로 접어들자 대학가의 반 유신 열기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경희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해 4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학생회 총무부장이던 내가 시위를 이끌었다. 이날 시위로 나는 구속, 수감되었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것은 물론이었다.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집에 알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되도록 늦게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다.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다가 교도소로 이송되던 날, 호송차의 동전만 한 구멍을 통해 어머니가 팔을 휘저으며 “재인아! 재인아!” 소리쳐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아들의 구속을 뒤늦게 알고 급히 서울로 올라오신 어머니가 어디라 의지할 데도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검찰청에서 우연히 호송차를 타는 나를 발견했던 모양이었다.
마치 영화 장면 같은 그 순간은 나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어려운 형편에 무리를 해가며 대학까지 보낸 자식이 포승줄에 묶여 교도소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부모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그 죄송스러움을 견디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아예 면회를 오지 않았다. 다행이 담당 판사의 소신 판결로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되었다. 그 판사는 얼마 후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었다고 전해 들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⑤ ]
특전사 A급 사병
석방이 되자 곧바로 입영 영장이 날아왔다. 신체검사 날짜와 입영 날짜가 하루 간격이었다. 소위 강제징집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특전사였다. 특전사가 공수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용산으로 가는 군용열차가 삼랑진을 지날 무렵이었다. 험한 곳에 배치 받은 나에게 동기들의 위로주가 계속 몰려들었다.
폭파 주특기를 부여 받고 6주간 훈련을 마칠 때에는 폭파 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화생방 최우수 표창도 함께 받았다. 어쨌든 자대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에는 단연 A급 사병이 돼 있었다.
군대에서 새삼 발견한 것은 내가 군대가 요구하는 기능을 상당히 잘 해내는 편이란 사실이었다. 가장 멋진 일은 점프(공중낙하)였다. 매우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지만 낙하산이 펼쳐져서 공중에 떠 있는 동안엔 정말 황홀할 정도였다. 수중 침투 훈련도 기억에 남는다. 부산 출신답게 수영은 좀 하는 편이라 첫해에 바로 고급인명구조원 자격을 취득했다.
아내가 면회를 왔던 일을 잊을 수 없다. 특히 자대에 배치 된 후 처음 온 면회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그 당시 군대의 면회란 무조건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와야 하는 거였다. 아무리 가난한 어머니라도 통닭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먹는 것은 아예 없이 한 아름 안개꽃 다발을 안고 왔다. 대한민국 군대에 이등병 면회 가면서 음식 대신 꽃을 들고 간 사람은 아내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꽃을 여러 내무반에 나누어 꽂아줬더니 다들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군대 경험이 내 삶에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난생 처음 해보는 그 많은 일들이 막상 닥치니 해 낼 수 있더라는 경험, 그것이 나를 훨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변호사 시절이나 청와대 시절에 처음 겪는 일을 만날 때 참고할 선례가 없어 스스로 부딪혀가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이런 마음가짐이 큰 도움이 되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⑥ ]
변호사가 되다
1978년 2월,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갑갑한 상황이었다. 복학은 오리무중, 취직하기도 어중간하고, 내 인생에서 가장 난감하고 대책 없는 기간이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 연세 겨우 쉰아홉,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다. 오래 동안 너무나 삶에 지쳐서 생명이 시나브로 꺼져 간 것 같아 너무나 가슴 아팠다. 나는 뒤늦게나마 한 번이라도 잘 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을 했다. 49제를 치른 다음날 나는 해남의 대흥사로 가서 틀어 박혔다. 그렇게 공부한 끝에 1979년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는 비켜가는 법이 없는 것인지, 2차 시험을 준비하던 중이던 그해 10월 부마항쟁이 터지고 급기야 10.26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시해되었다. 그때로부터 이듬해 5월까지, 나는 소위 ‘서울의 봄’이 일으키는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시간을 내어 2차 시험을 보긴 했지만 준비가 워낙 소홀했던 터라 경험이나 쌓자는 심정으로 치른 시험이었다. 따라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청난 시위와 구속을 거쳐 유치장에 갇혀 있을 무렵에는 합격자 발표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뜻밖의 낭보를 들고 온 사람은 아내였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학교 관계자들이 축하해 주기 위해 면회를 왔을 때, 나를 유치장 밖으로 내보낼 수 없으니 경찰서장은 그 분들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 축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조촐한 소주 파티까지 벌였다. 경찰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했다. 며칠 후 나는 석방되었다.
3차 면접을 앞두고 안기부 요원이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지금도 예전 데모할 때와 생각이 변함없느냐?”는 것이었다. 일종의 사상 검증인 셈이었다. 대답하기 곤혹스러웠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갔지만 결코 자존심을 굽히기는 싫었다. “그때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최종 발표가 있을 때까지, 그렇게 대답한 것을 후회했다. 다행이도 결과는 최종합격이었다.
연수원 시절은 평탄했다. 검사가 되어 남을 처벌하는 일이 내 성격에는 맞지 않게 느껴져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 때문에 임용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그리고 그 길목에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게 된다. 이렇듯 온갖 우연과 필연이 뒤엉켜, 운명적 수순처럼 그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⑦ ]
연애, 그리고 결혼
아내와 나는 대학 시절 법대 축제 때 파트너로서 처음 만났다. 서로에 대한 호감은 있었지만 한동안은 고작 눈인사나 나누는 숙맥들이었다. 그러다 75년 4월 시위에서 내가 최루 가스에 실신해버렸을 때 아내가 간호를 해 주었던 일을 계기로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첫 번째 구속이 되었을 때, 걱정이 돼서 면회를 왔다는 아내는 면회시간 내내 신문을 접어 안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내 모교인 경남고등학교가 무슨 전국 야구대회에서 우승한 기사였다. 감옥에 갇힌 내가 기뻐할 만 한 일을 궁리하다가 야구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야구를 좋아한단들,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처지에 그 소식이 무어 그리 절실했을까. 하지만 아내의 그런 마음 씀씀이가 귀여웠고 나는 두고두고 그 일을 생각하고 웃음을 짓고는 했다.
아내는 그 후로 내가 강제 징집 당했을 때는 군대로, 제대 후 고시 공부를 하고 있을 때는 또 그곳으로 면회를 다녔다. 아내는 우리의 연애사(史)를 면회의 역사라고 말하곤 했다. 언젠가 아내에게 내가 경희대에 가게 된 것은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나 보다고 말하는 것으로 아내에 대한 감사함을 은근히 표한 적이 있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장인장모님께 첫인사를 드린 건 군대시절이었다. 평일 날 열리는 아내의 졸업연주회에 참석하기 위해 영창 갈 각오를 하고 가짜 외출증을 끊어 달려갔다. 군복차림에 베레모를 쓰고 불쑥 나타난 나를 보고 그분들은 ‘경악’했다고 한다. 첫 인사를 드린 장면 치고는 참 거시기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랑에 눈멀면 이런 일 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사법연수원 시절, 적은 월급이었지만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7년 연애 끝에 드디어 결혼을 했다. 첫 애도 이 시절에 태어났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⑧ ]
'노무현'을 만나다
판사 임용이 무산 된 나는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작정하고 어머니도 모실 겸 부산행을 결심했다. 서울시립합창단원 생활을 하던 아내한테는 몹시 미안한 일이었지만, 아내가 흔쾌히 동의해 주어서 고마웠다.
사시 동기 박정규 씨의 소개로 노무현 변호사를 찾아갔다. 박정규 씨는 예전 노무현 변호사와 고시 공부를 함께한 인연이 있었고 정작 그가 노 변호사와 함께 일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검사로 임용되는 바람에 나를 대신 소개한 것이었다.
노 변호사의 첫 인상은 매우 소탈하고 격의가 없었다. 같은 과에 속한 사람이라는 동질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곧바로 의기투합하여 당일로 변호사 동업을 하기로 결정해버렸다. 하지만 말이 동업이지 나는 달랑 몸만 들어가면 될 정도로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였다. 덕분에 나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변호사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함께 ‘깨끗한 변호사’를 한번 해보자고 얘기했다. 그리고는 당시의 관행처럼 되어 있던 사건 알선 브로커를 단칼에 끊어버렸다. 판검사에 대한 접대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수입이 줄긴 했지만 사무실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도 애초부터 생활의 규모를 키우지 않고 근검절약하는 습관을 들였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자연히 주변의 법조인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했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했고 인간적으로도 매우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는 나를 동료로서 존중하여 결코 말을 낮추지는 않았다. 나도 웬만하면 형님 소리를 잘 하는 편인데 그러질 못했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찾아오는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고 나중에는 우리 사무소가 부산 경남 울산의 노동인권 사건의 센터처럼 변해버렸다. 재야운동에도 자연히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는 참으로 치열했고 경계가 없었다.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대의를 위한 실천에서도 한계를 두지 않고 철저하고자 했다. 나는 이것이 그가 가진 원칙주의의 힘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⑨ ]
6월 항쟁의 중심에서
1987년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벽두부터 달아올랐다. 부산의 추모 열기는 그 어느 지역보다 뜨거웠는데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이 부산극장 앞에서 개최한 추도식은 대규모 가두시위로 이어졌다. 검찰은 시위를 주도한 노 변호사를 잡아넣기 위해 이미 기각된 구속영장을 들고 판사의 집을 전전하며 하룻밤 사이에 무려 네 번이나 구속영장을 재청구 하는 탈법을 저질렀고 이 일이 모든 매스컴에 도배가 되자 노무현 변호사는 일약 전국적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민주화 열기는 점차 그 강도를 높여가며 6월 항쟁을 향해 치달았다. 나는 노 변호사와 함께 부산 변호사 사회에서는 전무후무한 ‘호헌철폐와 직선제를 요구하는 부산 변호사 시국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연일 가두시위의 선두에 서 있었다. 5월부터는 부민협을 모태로 한 ‘부산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 결성되어 노무현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 나는 상임집행위원이 되어 본격적으로 6월 항쟁에 뛰어들었다.
서울의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했을 때 오히려 부산에서 가톨릭 센터 농성을 더욱 강고하게 이어감으로써 항쟁의 불씨를 되살리고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런 투쟁 끝에 결국 군부독재정권의 항복 선언인 ‘6.29 선언’이 발표되었다.
6월 항쟁은 우리 민주화 운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민민주항쟁이었다. 직선제 개헌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설정한 ‘국본’이라는 연대투쟁기구가 결성돼, 그 지휘 하에 목표를 쟁취할 때까지 시종일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투쟁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중심적 역량을 발휘한 부산 국본의 역할은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부산 국본의 중심에 노무현 변호사가 있었다. 내가 알기로 적어도 5공시기 동안 노무현 변호사만큼 치열하게 투쟁한 이가 없었다. 내가 그런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⑩ ]
노무현을 국회로 보내다
6월 항쟁 승리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속 되거나 해고 되었다. 사건 변론은 모두 내 몫이었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사실상 변호사 업무에서 손을 놓고 현장을 누볐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부산지역 변호사 120명 중에서 기꺼이 선임계를 낸 91명을 포함, 99명이나 되는 대규모 공동 변호인단을 꾸려 재판에 임한 끝에 그는 구속적부심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변호사업무는 결국 정지되고 말았다.
1988년 4월의 13대 총선을 앞두고 노 변호사는 김영삼 총재의 영입제안을 받는다. 노 변호사는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부산지역 민주화운동권에서 먼저 논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의 정치권 진출을 찬성했고 대체적인 논의의 결과도 그랬다. 본인도 결단을 내렸다.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들이나 개인적 입신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산 민주화운동권을 대표해 파견되어 간다는 인식이 있었다.
노 변호사는 오래 산 남구를 포기하고 연고도 없는 동구를 고집했다. 그 지역구에 신군부의 5공 핵심 허삼수 씨가 나온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를 꺾어 5공을 심판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이겼고 정치에 입문했다. 그때 쓴 선거 구호가 ‘사람 사는 세상’이다. 이것은 이후 오래 동안,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한 뒤에도 즐겨 쓰는 사인 글이 되었다. 그만큼 사람 사는 세상은 쉬 오지 않는 꿈같은 것이었던지.
나는 정치인으로서의 노무현, 그의 굴곡진 행로를 낱낱이 지켜본 사람이다. 그를 키운 건 국회의원 선수(選數)가 아니라 낙선 회수였다고 할 만큼, 떨어진 선거가 더 많았다. 정치를 당분간 접고 변호사로 돌아올 것을 권유한 적도 있었지만, 일단 정치에 발을 담근 그는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딱 한번 그만둘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종로 지역구를 버리고 부산 강서에 출마했을 때였다. 본인 스스로도 이번에 떨어지면 정치 그만 두겠다고 했다. 그는 떨어졌다.
하지만 지역구도에 온몸으로, 줄기차게 맞서는 그의 모습에 감동한 국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국적인 지지가 몰려들었고 이 힘이 근거가 되어 결국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비운으로 가시고 나니 처음부터 말렸어야 했다는 회한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노무현 변호사가 초선의원으로 5공 청문회의에서 맹활약을 보이는 등 정치인으로 성장해 갈 때 나는 부산에 혼자 남아 노동관련 사건 변호에 매달렸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늘 행복했다. 일이 많아 힘들었지만 내 삶에서 가장 안정된 시기였고 나의 개인적인 삶과 세상을 향한 나의 의무감이 나름대로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충만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동의대 사건 재판과 신 씨 일가 간첩단 사건의 변론이었다. 1995년 법무법인 부산을 설립했고, 나는 주로 노동운동이나 노조활동을 지원하는 단체 쪽 일에 집중했다. 이때 관여하거나 함께 만든 단체들로는 부산 노동문제 연구소, 부산 노동단체협의회, 노동자를 위한 연대 등이 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11]
2002년 대선
국회의원 노무현의 지역주의와의 싸움은 참으로 가열했다. 자신의 유, 불리를 따지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히는 그의 진정성을 국민들이 알아주기 시작했다. 그는 15대 총선 때 처음으로 대선 출마 의지를 내보였다. 그리고 2001년 9월 6일, 드디어 대선 출마를 공식선언하기에 이른다.
그의 대선행보는 남달랐다. 조직과 돈을 먼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 전문가들로 학습 팀을 꾸려 국정운영에 대한 공부부터 시작했다. 참으로 노무현다운 준비였다. 후보 경선이 시작되었고 나는 부산, 울산 지역 경선을 책임지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워낙 노동운동이 활발하던 지역이라 그간 우리가 각급 노조와 맺은 끈끈한 유대와 인맥이 큰 힘이 되었다. 다들 기억하고 있을 ‘광주 경선의 감동’을 넘어 그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나는 다시 부산 선대본부장을 맡았다. 이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란 말이 나왔다. 나를 정치판에 끌어들인 사실이 미안했던지 노 대통령께서 어떤 행사에서 나를 추어주기 위해 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담긴 그의 속 깊은 우정에 대해 언제나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비록 과분하긴 하지만 지금도 그 말을 가장 듣기 좋은 칭찬으로 여기고 있다.
그의 대선 가도는 참으로 험난했다. 후보가 되고 난 뒤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지지율이 하락했다. 당내의 후보 흔들기, 후보교체론에 이어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다. 가장 힘든 시기였고 절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그는 모든 것을 뚝심과 배짱으로 정면 돌파하며 꿋꿋하게 버텼다.
분수령은 정몽준 씨와의 후보단일화였다. 지지율이 뒤지는 상황에서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 방식은 매우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나는 후보단일화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 방식을 받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말씀드렸다. 당내에서는 걱정이 많았지만 오히려 불리함을 무릅쓰고 이런 방식을 담대하게 수용한 노 후보에 대해 국민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난관은 또 있었다. 정몽준 씨 측에서 연합정부, 사실상 권력의 절반을 요구하며 그것을 명문화해 달라고 했다. 장관 자리를 어떻게 나눌지를 특정하자는 것이었다. 받지 않으면 판을 깬다는 식이었다. 당내에서는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라도 우선 받으라고 압박했다. 노 후보는 매우 힘들어하면서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때 나는 “우리가 살면서 여러 번 겪어 봤지만, 역시 어려울 때는 원칙에 입각해 가는 것이 정답이다. 뒤돌아보면 그것이 언제나 최선이었다. 당신이 옳다.”고 말씀드렸다. 외로우셨던지 나의 지지의사를 듣고 노 후보는 매우 기뻐했다.
그런 선거가 또 있을까. 투표 전날 밤, 정몽준 씨는 단일화 약속을 파기하고 지지를 철회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정몽준 씨를 직접 찾아가라고 종용했으나 노 후보는 잠을 잔다고 하니 내가 깨워서 설득 좀 하라고 전화가 오기까지 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 되던 날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날만큼은 나도 그 속에 휩쓸리고 싶었다. 아름다운 밤,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싶은 순간이었다. 그때로서는 앞으로 겪게 될 고난은 생각지도 못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12]
참여정부 민정수석
참여정부 시절 나는 민정수석, 시민사회 수석, 다시 민정수석을 거쳐 비서실장을 지냈다. 능력에 비해 과분한 자리들이었으나 나에게 맡겨진 책무를 다하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해 일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처음 민정수석 직을 맡아 달라 얘기했을 때 나는 그런 제안을 하는 그의 의중이 무엇인지, 내가 그 소임을 맡게 되면 그가 하려는 개혁을 도울 수 있을까를 깊이 고민했다. 노 대통령은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는 말씀까지 했다. 내가 대답했다. “나는 정치를 잘 모르니 정무적 판단능력이나 역할은 잘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리원칙을 지켜 나가는 것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를 쓰십시오.” 그리고 덧붙였다. “민정수석으로 끝내겠습니다.” 그리고 “정치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나의 청와대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참여정부의 첫 내각 인선이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업무 특성상 민정수석실의 검증을 필요로 하는 일이어서 사실상 나의 첫 당면과제였다. 특히 내각의 사회분야 쪽엔 상당부분 깊이 관여했다. 첫 조각은 파격 그 자체였다. 나는 개혁적 인사들이 일거에 내각과 청와대를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당선인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고영구 국정원장, 이용섭 국세청장 등의 기용은 그런 내각의 성격을 잘 말해주었다.
평창동의 작은 연립에 세를 얻어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마당이 100평이 넘는 부산 집을 팔아도 강남 30평 아파트 전세 값이 안 됐다. 근무 시간이 길어 사생활이 크게 없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이전 생활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하긴 달라질 이유가 없었다. 업무 시간 외에는 내가 직접 차를 모는 것, 방이 따로 없는 대중음식점에서 밥을 먹는 것, 사람들 틈에 섞여 줄서서 기다리는 것, 비행기나 기차의 일반석을 이용하는 것, 수행원 없이 혼자 다니는 것 등, 나로서는 당연한 일들을 많은 사람들이 신기하게 받아들였다. 기왕의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이미지와는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다. 참여정부의 인사들은 대개가 그랬기 때문에 일요일 혼자 간 등산길에서 서로 마주치기도 했다.
청와대 생활은 힘들고 고달팠다. 업무량이 한계용량을 늘 초과하는 느낌이었다. 언제나 잠이 부족했다. 심지어 치과치료를 받느라 드릴이 어금니를 긁어내고 있는 상황에서도 졸음이 쏟아졌다. 이렇게 무리를 하다 보니 민정수석 1년 만에 이를 열 개나 뽑아야 했다.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민정수석실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다. 재미있는 것은 이를 뺀 개수가 직급에 따라 차이가 났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업무연관성에 대한 분명한 증거라고 우스갯소리를 나누기도 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13]
히말라야로 떠나다
2004년 2월 12일, 나는 민정수석을 사퇴했다. 내 의사와 무관하게, 총선에 나가야 한다는 ‘징발론’이 당에서 제기되었다. 이해 할 수 있는 요구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나의 원칙주의를 불편해 했던 당의 인사들이 차제에 나를 청와대대에서 내보내려는 의도도 일부 깔려 있었다.
출마에 뜻이 없었던 나는 아예 민정수석 직을 그만두기로 했다. 건강상의 이유를 핑계로 사의를 표명하고 2004년 2월 12일에 정식으로 민정수석을 사퇴했다. 청와대 들어온 지 1년 만의 해방이었다. 대통령과 안에서 고생하는 분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처럼 꿈같은 자유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났다. 안나푸르나가 목적지였다. 해발 3,500까지 올라서 산간마을을 순회하는 코스를 택했다. 체력이 형편없이 떨어져서 아주 고생을 했다. 포터를 한 명 고용했는데 자그만 체구의 그가 혼자 짐을 다 지고 가는 것이 안쓰러워 10kg쯤 되는 짐을 떠맡았다가 트래킹 내내 어찌나 무거운지 죽을 고생을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남자의 체면이 있지, 하는 심정에 중간에 되돌려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내에게 지울 수도 없어서 참 힘들었다. ‘사서 고생’, 딱 그 경우였다.
그리고 이 트래킹 여행 중에 담배를 끊었다. 땀 흘리며 산길을 걷다가 전망 좋은 곳에서 쉬면서 피우는 담배의 꿀 같은 맛을 잘 알고 있어서 무척 아쉽기는 했지만, 워낙 공기가 깨끗해서 그곳에 담배연기를 내뿜는다는 게 죄를 짓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가 있었다. 트래킹 내내 그렇게 힘들었던 데에는 아마도 금단증세도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14]
탄핵 대리인
트래킹 여행 중 카트만두에 도착해 쉬고 있을 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식을 들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신문 International Herald Tribune을 읽으며 아침을 먹고 있는데 ‘South korea President Roh impeached’ 란 제목이 눈에 띄었다. 취임 한 달이 채 안 됐을 때부터 탄핵 운운하던 한나라당이었기 때문에 이번도 정치공세일 것으로 생각했으나 말로만 하던 것과는 달리 탄핵소추안을 발의까지 했다면 정국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행을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탄핵 결의안은 국회를 통과했고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 되었다. 노 대통령은 탄핵 대리인단 구성을 비롯해 법적 대응 전반을 맡아 달라고 부탁해 왔다. 나는 변호사 개업신고부터 내고 대리인단 구성에 착수했다. 중립적이면서도 명망과 실력을 두루 갖춘 분들을 모시고자 했다.
그 결과 지금 생각해도 당시 우리가 갖출 수 있는 최고의 진영을 갖출 수 있었다. 유현석 변호사가 좌장 역할을 맡았고, 한승헌 변호사가 총괄 역할을 자임했다. 나는 대리인단의 간사로서 실무적 역할과 함께 홍보를 맡았다.
탄핵 재판 중에 있었던 촛불집회에도 자주 참석했다. 민의가 곧 헌법이라면 그 일 또한 재판 준비에 값하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 치러졌던 17대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차지함으로써 단독으로 원내 과반수 정당이 되었다. 탄핵에 대한 민심의 엄중한 심판이었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졌다. 당연히, 기각이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15]
마지막 비서실장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 노 대통령이 다시 나를 불렀다.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마지막 비서실장은 퇴임 후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자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맡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워낙 힘들었다. 그럴수록 마무리가 중요했다. “그래 우짜겠노. 대통령과 마지막을 함께 하자.”라고 생각했다. 비장한 각오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원칙과 초심과 긴장을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취임사에서 세 가지를 당부했다. 참여정부의 성공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분명히 갖자,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까지 하루도 헛되이 보내는 만만함이 없어야 한다, 끝까지 도덕성을 지켜 나가자. 직원들은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퇴임 일까지 해줬다고 생각한다.
임기 마지막 해인데도 정치적 이슈들이 끊이지 않았다. 원 포인트 개헌(대통령 임기와 국회의원 임기를 일치시키는 내용만 따로 떼어서 개헌하는 것) 제안이라든지 기자실을 개방형 브리핑 룸으로 확장 통합하는 일 등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이해관계와 언론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 것이 못내 아쉽다.
임기 말까지도 청와대는 여전히 분주했다. 역대 청와대의 임기 말 모습이었던 ‘완전히 손을 놓는 분위기’나 ‘개점휴업 상태’와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우리가 끝까지 도덕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우리는 누가 뭐하고 하든, 우리가 해야 될 일을 로드맵에 따라 원리원칙대로 묵묵하게 해 나갔을 뿐이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16]
남북정상회담
비서실장을 지내는 동안 가장 보람 있고 컸던 일은 2007년 10월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참여정부는 임기 내내 북핵문제로 시달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확실한 원칙을 단호하고도 일관되게 밀어붙였다. 대통령의 뜻이 워낙 강하다 보니 공화당 부시 행정부도 결국 대북 강경일변도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로 가닥을 잡았다.
이에 우리도 이라크 파병을 통해 미국에 성의를 보이는 등 신뢰를 쌓았다. 그리고 이런 바탕 위에서 6자 회담의 틀을 마련해 완전한 비핵화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해 졌으니 이는 긴 과정동안 끊임없이 인내하면서 북한과 신뢰를 쌓아나간 결실이었다.
정상회담이 열리기까지에는 참으로 많은 사연들이 숨어있다. 2005년 6월, 6.15 공동선언 5주년을 맞아 대통령은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을 특사로 평양에 보내 김정일을 만나게 했다. 정 장관이 지참한 친서에는 ‘6자회담을 조기에 재개하고 그 성과를 이어받아 정상회담을 열고 싶다는 대통령의 의중과 모든 내용을 대통령을 대신한 특사와 허심탄회하게 의논해 달라’는 당부가 들어 있었다.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9.19공동성명이 채택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하지만 미국이 북한의 유일한 외환 결제 창구(BDA)를 동결해 버리는 조치로 9.19 공동성명을 무색하게 만들자 정상회담 준비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6년 11월 김만복 국정원장이 취임해 정상회담 추진 의지를 밝혔고 2007년 5월에는 백종천 안보실장까지 8.15 이전에 반드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계획을 보고하면서 회담 준비는 다시 급물살을 탔다. 비서실장인 나, 국정원장, 안보실장이 이를 추진하고 준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매주 목요일 정기적으로 만났다. 우리는 이를 ‘안골 모임’이라 불렀다.
그해 7월 말쯤에 북측에서 모종의 연락이 올 것 같다고 해서 중순부터 기대를 갖고 기다렸다. 하지만 7월 17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샘물교회 목사, 신도들이 텔레반에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해 백종천 실장은 현장으로, 나는 인질사건의 해결을 관장하기 위해 동분서주 할 수밖에 없었다.
7월 말에 북한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을 때, 인질사건만 없었더라면 내가 특사로 갈 예정이었지만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고, 김만복 원장이 북한을 방문해 정상회담 추진 합의를 하고 돌아왔다.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면서 실무적 준비에 들어가 드디어 8월 28일로 정상회담 일정이 도출되었다.
대단히 촉박한 일정이었다. 일단 국민들께 그 사실을 알리고 청와대의 거의 모든 인력이 달라붙어 실무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번엔 북한에서 발생한 대규모 수해가 발목을 잡았다. 북측이 이를 이유로 회담연기를 요청해 왔던 것이다. 아쉬움이 컸지만 대신 더욱 알차게 준비할 시간을 번 셈이라 위안을 삼았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27]
그가 떠난 자리
노무현 대통령이 모든 번뇌와 시대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저 안식과 자유를 누리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안장식을 준비했다. 불교계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어 49재를 지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묘역 조성은 문화예술계의 전문가들이 기꺼이 맡아주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서서 ‘아주 작은 비석위원회’를 구성했다. 유홍준 교수, 역사학자 안병욱, 건축가 승효상, 미술가 임옥상과 안규철, 조경 정영선, 그리고 황지우 시인 등으로 짜여진 드림팀이었다. 그 분들 덕분에 오늘의 묘역이 이렇게 아름답게 꾸며질 수 있었다.
대통령이 유언에서 밝힌 ‘아주 작은 비석 하나의 정신’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유언은 세상을 떠나는 이의 겸양일 뿐이므로 아주 작은 비석은 국민들의 추모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추모공간이 되어야 마땅했다. 그래서 유골을 안장해 묘소를 만들되 봉분 대신 고인돌 같은 너럭바위 하나를 올려놓고 비석은 따로 세우지 않고 너럭바위에 비명을 새겨 그것이 비석이 되도록 했다. 유 청장의 아이디어였다. 황지우 시인은 묘역 바닥에 갈 박석에 추모글귀를 받으면 그보다 더 좋은 비문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안장식은 2009년 7월 10일에 엄수되었다. 유골은 백자 도자기와 연꽃 석함에 넣어져 안장되었다. 부장품으로는 참여정부 5년의 기록이란 5부작 다큐멘터리와 대통령 서거 후 추모인파를 촬영한 영상 DVD를 넣어드렸다. 역사가 참여정부를 평가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 토대가 될 다큐와, 당신이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아님을 증거 하는 추모영상을 하늘에서나마 보시라는 심정에서 그렇게 했다.
안장식을 치른 뒤 1주기까지 약 10개월 동안은 묘역조성에 전력을 다했다. 1만 8천 명의 시민들이 저마다 추모의 글귀를 새간 박석을 묘역 주변에 깔았다. 건축가 승효상 씨의 구상이었다. 박석 배치는 미술가 임옥상 씨가 설계했다.
박석 모집이 시작되자 순식간에 희망자가 몰려 마감이 되자 미처 신청 못한 분들의 원성이 자자해 설계를 바꾸면서까지 박석 수를 늘렸다. 시민들이 새긴 추모문구는 한 줄 한 줄이 감동이었다. 황지우 시인의 말처럼 어디에서 이보다 더 나은 비문을 얻을 수 있을까.
나도 아내와 함께 박석 하나를 신청해 “편히 쉬십시오” 단 한 줄을 새겼다. 나는 그분이 대통령 재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게 한스러워 그야말로 안식을 바라는 마음 말고는 없었다.
장례를 모두 마친 후 지속적인 추모기념사업을 위해 봉하엔 봉하재단을, 전국적으로는 노무현재단을 설립해 각각 감사직과 상임이사직을 맡았다. 확실하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응당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를 이야기한다. 고맙기만 하다. 하지만 아무리 대통령 서거에 대해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한단들 그분이 살아 계신 것만 할까. 가끔 꿈에서 대통령을 만나기도 한다. 술을 한 잔 마시면 가끔씩 옛날을 추억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인생에서 노무현은 무엇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내 인생을 굉장히 많이 규정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명적이다. 그것이 꼭 좋았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할 수 없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너무 많아서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와의 만남부터 오랜 동행, 이별은 내가 계획했던 것도 아니었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가 남긴 숙제가 있다면 그 시대적 소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물며 나는 더욱 그렇다. 기꺼이 끌어안고 남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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