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글

문재인후보가 걸어온 길 1~29회 연재

by 에비뉴엘 2012. 12. 20.
반응형


이 글은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의 글입니다.

출처는 문재인닷컴.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①]


어린시절 

 


나는 우리 부모님이 거제도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중인 1952년, 거제도의 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이던 부모님께서 1950년 12월의 ‘흥남 철수’ 때, 잠시 난을 피한다는 심정으로 별다른 준비도 없이미군 선박에 몸을 싣고 떠난 피난길이 거제도까지 이어질 줄은 당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온통 눈 덮인 순백의 고향 풍경과는 너무도 다르게 ‘따뜻한 남쪽 나라’ 거제도는 푸른 보리밭이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땅이었고, 어머니는 그 풍경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더라고 몇 번이나 되뇌고는 했다. 따뜻한 날씨만큼이나 푸근했던 거제도 인심 덕분에 부모님은 간신히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3주 정도 예상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야말로 맨손이나 다름없이 고향을 떠나온 부모님 앞에는 뿌리 잃은 고단한 삶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흥남의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에서 수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 함경도 지역의 명문이던 함흥농고를 졸업하고 흥남 시청 농업계장을 지내던 아버지가 피난지 거제도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포로수용소의 노무일 말고는 달리 없었다. 어머니도 살림을 도와 계란을 떼어다가 어린 나를 업은 채 부산까지 건너가 파는 고달픈 행상 일을 했다. 이렇게 조금씩 모은 돈으로 우리 일가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맞추어 부산 영도로 이사를 했다. 커다란 배에서 내려 누렇게 익은 조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조밭을 지나 이사 갈 집으로 향하던 풍경이 내 어린 날의 기억으로 지금껏 가슴에 남아 있다. 


 교사나 공무원을 하면 맞을 아버지가 성격에도 어울리지 않는 장사를 시작하셨지만 잔뜩 빚만 지고 손을 털고 말았다. 받을 돈은 받지 못하면서 갚아야 할 돈은 끝내 갚느라 오랫동안 허덕였다. 아버지는 이 장사의 실패를 끝으로 무너지고 말았고 끝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대신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어머니 역시 별 뾰족한 수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탄 배달을 한 적도 있었다. 나도 그 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는데 연탄 검댕을 묻히며 리어카를 끄는 일이 창피해 툴툴거리는 바람에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일쑤였다. 외려 어린 동생이 묵묵히 도왔다. 한번은 연탄을 잔뜩 싣고 언덕길을 내려가다가 뒤에서 잡아 주고 있던 어머니가 힘이 달려 손을 놓치는 바람에 리어카가 길가에 처박힌 적이 있었다. 크게 다친 데도 없었고 다만 연탄이 좀 깨졌을 뿐인데, 이 일로 크게 상심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라 호 태풍 때에는 지붕이 홀랑 날아가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때 하필 아버지는 장사를 나가 계셔서 집에는 어린 우리들과 어머니뿐이었다. 거센 바람에 부엌문의 경첩이 빠져 삐걱거렸지만 우리 힘으로는 그 문을 온전히 지켜내기란 역부족이었다. 부엌문이 떨어져버리자 왈칵 밀려든 바람은 온 집을 팽팽하게 부풀리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루핑 지붕을 밀어 올려 홀랑 날려버렸다. 그 지붕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찾을 수도 못했다.


 영도의 신선성당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구호물자를 나눠주었다. 학교를 마치고 양동이를 들고 가 줄서서 기다려 배급받곤 하던 강냉이 가루며 전지분유는 끼니 해결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나는 그 일이 몹시 싫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야말로 장남의 노릇이라 내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꼬마라고 수녀님들이 사탕이나 과일을 손에 쥐어 주기도 했는데 어린 눈에는 수녀님들이 천사인 것만 같았다. 이런 고마운 인연으로 어머니가 먼저 가톨릭에 입교를 하셨고 나도 3학년 때 영세를 받았다. 나는 훗날 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어머니는 지금도 그 성당에 다니고 계신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②]


자전거   

 

가난에서 비롯된 결핍감 못지않게 가난이 나를 가르친 것도 무척 많았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은 독립심이었다. 웬만한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것, 힘들게 보여도 일단 혼자 해결하려고 부딪혀 보는 것,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긴 인생을 통 털어 볼 때 참으로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제일 중요한 건 아니다’라는 가치관은 나로 하여금 가난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을 주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갖지 못한 물건들과 하지 못한 많은 일들, 그러한 결핍이 가져다주는 아쉬움이 왜 없었겠는가. 돈이 드는 일은 애당초 내 몫이 아니란 자각 때문에 말도 꺼내보지 못한 일들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내 자전거를 갖는 것은 고사하고 푼돈을 내고 빌려 타는 것도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 자전거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SBS의 힐링 캠프에 출연했을 때 이 사연이 알려져 나는 제작진으로부터 자전거 한 대를 선물로 받았다. 4.11 총선 당시 나는 그 자전거를 사상의 선거 사무실에 갖다 놓았는데 커다란 선거 벽보 앞에 놓인 자전거 앞에서 많은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곤 했다. 소위 그럴싸한 포토 존이 된 것이다. 자원봉사자들은 그 자전거에 바람개비를 달아 장식해 주었다. 그 자전거를 타고 바람개비를 힘차게 돌리며 맘껏 달리는 상상을 하면 언제나 가슴이 설레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③]


문제아


 

  나는 과외수업 같은 것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지만 무난히 부산의 명문 경남중학교에 합격했다. 아버지께서 국제시장 안의, 고향사람이 운영하는 교복맞춤집에서 교복을 맞춰 주시며 아주 자랑스러워하시던 모습이 그립게 떠오른다.

 


 

빈부의 격차가 확연한 경남중학교의 분위기 속에서 처음으로 세상의 불공평함과 그로 인한 위화감을 피부로 느꼈다. 점차 학교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우리나라 소설에서 시작된 독서는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서 <사상계> 같은 사회 비평적 잡지와 야한 소설에 이르기까지, 독서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사회와 인생을 알게 되었고 기초적인 사회의식도 갖추게 되었다. 자연히 공부는 뒷전이었다. 훗날 대학 입시 때 공부를 소홀히 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대신 나의 내면을 성장시키고 건강한 사회의식을 갖게 됐으니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중, 고등학교 때 내 별명은 ‘문제아’였다. 물론 처음엔 이름 때문에 생긴 별명일 뿐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 사회에 대한 반항심도 생기고 고 3때엔 술 담배도 하게 되었다.

 

또 소위 ‘노는 친구들’과도 어울리면서 폭넓게 친구들을 사귀어 가는 과정에서 실제로 정학을 먹기도 했으니 정말 문제아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는 3선 개헌 반대 시위, 학교를 병영화 하려는 교련에 대한 항의 등을 계기로 크게 높아진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을 가슴에 담은 ‘정의파’라는 자의식이 더 강했던 게 아닌가 싶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④ ]


학생운동에 뛰어들다 





 나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학과를 가기엔 높은 점수가 아깝다는 매우 ‘비학문적’인 이유로 반대하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 법대로 진로를 바꿨다.


 3학년으로 올라가자 대학가의 유신반대 열기는 날로 고조되었다. 긴급조치가 연이어 발효되었고 민청학련사건, 인혁당 사건 등이 터졌다. 이렇다 할 학생운동이 없던 경희대에서도 가을에 접어들자 재단 퇴진 농성을 계기로 유신 반대 시위가 계획되었다. 나는 이 시위에 필요한 선언문을 작성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1975년으로 접어들자 대학가의 반 유신 열기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경희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해 4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학생회 총무부장이던 내가 시위를 이끌었다. 이날 시위로 나는 구속, 수감되었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것은 물론이었다.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집에 알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되도록 늦게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다.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다가 교도소로 이송되던 날, 호송차의 동전만 한 구멍을 통해 어머니가 팔을 휘저으며 “재인아! 재인아!” 소리쳐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아들의 구속을 뒤늦게 알고 급히 서울로 올라오신 어머니가 어디라 의지할 데도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검찰청에서 우연히 호송차를 타는 나를 발견했던 모양이었다.


 마치 영화 장면 같은 그 순간은 나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어려운 형편에 무리를 해가며 대학까지 보낸 자식이 포승줄에 묶여 교도소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부모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그 죄송스러움을 견디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아예 면회를 오지 않았다. 다행이 담당 판사의 소신 판결로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되었다. 그 판사는 얼마 후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었다고 전해 들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⑤ ]


특전사 A급 사병



 석방이 되자 곧바로 입영 영장이 날아왔다. 신체검사 날짜와 입영 날짜가 하루 간격이었다. 소위 강제징집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특전사였다. 특전사가 공수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용산으로 가는 군용열차가 삼랑진을 지날 무렵이었다. 험한 곳에 배치 받은 나에게 동기들의 위로주가 계속 몰려들었다.


폭파 주특기를 부여 받고 6주간 훈련을 마칠 때에는 폭파 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화생방 최우수 표창도 함께 받았다. 어쨌든 자대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에는 단연 A급 사병이 돼 있었다. 



   

군대에서 새삼 발견한 것은 내가 군대가 요구하는 기능을 상당히 잘 해내는 편이란 사실이었다. 가장 멋진 일은 점프(공중낙하)였다. 매우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지만 낙하산이 펼쳐져서 공중에 떠 있는 동안엔 정말 황홀할 정도였다. 수중 침투 훈련도 기억에 남는다. 부산 출신답게 수영은 좀 하는 편이라 첫해에 바로 고급인명구조원 자격을 취득했다.



아내가 면회를 왔던 일을 잊을 수 없다. 특히 자대에 배치 된 후 처음 온 면회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그 당시 군대의 면회란 무조건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와야 하는 거였다. 아무리 가난한 어머니라도 통닭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먹는 것은 아예 없이 한 아름 안개꽃 다발을 안고 왔다. 대한민국 군대에 이등병 면회 가면서 음식 대신 꽃을 들고 간 사람은 아내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꽃을 여러 내무반에 나누어 꽂아줬더니 다들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군대 경험이 내 삶에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난생 처음 해보는 그 많은 일들이 막상 닥치니 해 낼 수 있더라는 경험, 그것이 나를 훨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변호사 시절이나 청와대 시절에 처음 겪는 일을 만날 때 참고할 선례가 없어 스스로 부딪혀가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이런 마음가짐이 큰 도움이 되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⑥ ]


변호사가 되다



1978년 2월,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갑갑한 상황이었다. 복학은 오리무중, 취직하기도 어중간하고, 내 인생에서 가장 난감하고 대책 없는 기간이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 연세 겨우 쉰아홉,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다. 오래 동안 너무나 삶에 지쳐서 생명이 시나브로 꺼져 간 것 같아 너무나 가슴 아팠다. 나는 뒤늦게나마 한 번이라도 잘 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을 했다. 49제를 치른 다음날 나는 해남의 대흥사로 가서 틀어 박혔다. 그렇게 공부한 끝에 1979년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는 비켜가는 법이 없는 것인지, 2차 시험을 준비하던 중이던 그해 10월 부마항쟁이 터지고 급기야 10.26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시해되었다. 그때로부터 이듬해 5월까지, 나는 소위 ‘서울의 봄’이 일으키는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시간을 내어 2차 시험을 보긴 했지만 준비가 워낙 소홀했던 터라 경험이나 쌓자는 심정으로 치른 시험이었다. 따라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청난 시위와 구속을 거쳐 유치장에 갇혀 있을 무렵에는 합격자 발표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뜻밖의 낭보를 들고 온 사람은 아내였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학교 관계자들이 축하해 주기 위해 면회를 왔을 때, 나를 유치장 밖으로 내보낼 수 없으니 경찰서장은 그 분들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 축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조촐한 소주 파티까지 벌였다. 경찰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했다. 며칠 후 나는 석방되었다.


3차 면접을 앞두고 안기부 요원이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지금도 예전 데모할 때와 생각이 변함없느냐?”는 것이었다. 일종의 사상 검증인 셈이었다. 대답하기 곤혹스러웠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갔지만 결코 자존심을 굽히기는 싫었다. “그때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최종 발표가 있을 때까지, 그렇게 대답한 것을 후회했다. 다행이도 결과는 최종합격이었다.


연수원 시절은 평탄했다. 검사가 되어 남을 처벌하는 일이 내 성격에는 맞지 않게 느껴져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 때문에 임용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그리고 그 길목에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게 된다. 이렇듯 온갖 우연과 필연이 뒤엉켜, 운명적 수순처럼 그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⑦ ]


연애, 그리고 결혼


   아내와 나는 대학 시절 법대 축제 때 파트너로서 처음 만났다. 서로에 대한 호감은 있었지만 한동안은 고작 눈인사나 나누는 숙맥들이었다. 그러다 75년 4월 시위에서 내가 최루 가스에 실신해버렸을 때 아내가 간호를 해 주었던 일을 계기로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첫 번째 구속이 되었을 때, 걱정이 돼서 면회를 왔다는 아내는 면회시간 내내 신문을 접어 안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내 모교인 경남고등학교가 무슨 전국 야구대회에서 우승한 기사였다. 감옥에 갇힌 내가 기뻐할 만 한 일을 궁리하다가 야구를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야구를 좋아한단들,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처지에 그 소식이 무어 그리 절실했을까. 하지만 아내의 그런 마음 씀씀이가 귀여웠고 나는 두고두고 그 일을 생각하고 웃음을 짓고는 했다.


 아내는 그 후로 내가 강제 징집 당했을 때는 군대로, 제대 후 고시 공부를 하고 있을 때는 또 그곳으로 면회를 다녔다. 아내는 우리의 연애사(史)를 면회의 역사라고 말하곤 했다. 언젠가 아내에게 내가 경희대에 가게 된 것은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나 보다고 말하는 것으로 아내에 대한 감사함을 은근히 표한 적이 있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장인장모님께 첫인사를 드린 건 군대시절이었다. 평일 날 열리는 아내의 졸업연주회에 참석하기 위해 영창 갈 각오를 하고 가짜 외출증을 끊어 달려갔다. 군복차림에 베레모를 쓰고 불쑥 나타난 나를 보고 그분들은 ‘경악’했다고 한다. 첫 인사를 드린 장면 치고는 참 거시기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랑에 눈멀면 이런 일 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사법연수원 시절, 적은 월급이었지만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7년 연애 끝에 드디어 결혼을 했다. 첫 애도 이 시절에 태어났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⑧ ]



'노무현'을 만나다




 판사 임용이 무산 된 나는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작정하고 어머니도 모실 겸 부산행을 결심했다. 서울시립합창단원 생활을 하던 아내한테는 몹시 미안한 일이었지만, 아내가 흔쾌히 동의해 주어서 고마웠다. 


 사시 동기 박정규 씨의 소개로 노무현 변호사를 찾아갔다. 박정규 씨는 예전 노무현 변호사와 고시 공부를 함께한 인연이 있었고 정작 그가 노 변호사와 함께 일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검사로 임용되는 바람에 나를 대신 소개한 것이었다.  


 노 변호사의 첫 인상은 매우 소탈하고 격의가 없었다. 같은 과에 속한 사람이라는 동질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곧바로 의기투합하여 당일로 변호사 동업을 하기로 결정해버렸다. 하지만 말이 동업이지 나는 달랑 몸만 들어가면 될 정도로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였다. 덕분에 나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변호사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함께 ‘깨끗한 변호사’를 한번 해보자고 얘기했다. 그리고는 당시의 관행처럼 되어 있던 사건 알선 브로커를 단칼에 끊어버렸다. 판검사에 대한 접대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수입이 줄긴 했지만 사무실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도 애초부터 생활의 규모를 키우지 않고 근검절약하는 습관을 들였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자연히 주변의 법조인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했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했고 인간적으로도 매우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는 나를 동료로서 존중하여 결코 말을 낮추지는 않았다. 나도 웬만하면 형님 소리를 잘 하는 편인데 그러질 못했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찾아오는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고 나중에는 우리 사무소가 부산 경남 울산의 노동인권 사건의 센터처럼 변해버렸다. 재야운동에도 자연히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는 참으로 치열했고 경계가 없었다.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대의를 위한 실천에서도 한계를 두지 않고 철저하고자 했다. 나는 이것이 그가 가진 원칙주의의 힘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⑨ ]


6월 항쟁의 중심에서


 


 1987년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벽두부터 달아올랐다. 부산의 추모 열기는 그 어느 지역보다 뜨거웠는데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이 부산극장 앞에서 개최한 추도식은 대규모 가두시위로 이어졌다. 검찰은 시위를 주도한 노 변호사를 잡아넣기 위해 이미 기각된 구속영장을 들고 판사의 집을 전전하며 하룻밤 사이에 무려 네 번이나 구속영장을 재청구 하는 탈법을 저질렀고 이 일이 모든 매스컴에 도배가 되자 노무현 변호사는 일약 전국적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민주화 열기는 점차 그 강도를 높여가며 6월 항쟁을 향해 치달았다. 나는 노 변호사와 함께 부산 변호사 사회에서는 전무후무한 ‘호헌철폐와 직선제를 요구하는 부산 변호사 시국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연일 가두시위의 선두에 서 있었다. 5월부터는 부민협을 모태로 한 ‘부산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 결성되어 노무현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 나는 상임집행위원이 되어 본격적으로 6월 항쟁에 뛰어들었다.


서울의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했을 때 오히려 부산에서 가톨릭 센터 농성을 더욱 강고하게 이어감으로써 항쟁의 불씨를 되살리고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런 투쟁 끝에 결국 군부독재정권의 항복 선언인 ‘6.29 선언’이 발표되었다.



 6월 항쟁은 우리 민주화 운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민민주항쟁이었다. 직선제 개헌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설정한 ‘국본’이라는 연대투쟁기구가 결성돼, 그 지휘 하에 목표를 쟁취할 때까지 시종일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투쟁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중심적 역량을 발휘한 부산 국본의 역할은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부산 국본의 중심에 노무현 변호사가 있었다. 내가 알기로 적어도 5공시기 동안 노무현 변호사만큼 치열하게 투쟁한 이가 없었다. 내가 그런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⑩ ]


노무현을 국회로 보내다



   6월 항쟁 승리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속 되거나 해고 되었다. 사건 변론은 모두 내 몫이었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사실상 변호사 업무에서 손을 놓고 현장을 누볐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부산지역 변호사 120명 중에서 기꺼이 선임계를 낸 91명을 포함, 99명이나 되는 대규모 공동 변호인단을 꾸려 재판에 임한 끝에 그는 구속적부심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변호사업무는 결국 정지되고 말았다.


 1988년 4월의 13대 총선을 앞두고 노 변호사는 김영삼 총재의 영입제안을 받는다. 노 변호사는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부산지역 민주화운동권에서 먼저 논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의 정치권 진출을 찬성했고 대체적인 논의의 결과도 그랬다. 본인도 결단을 내렸다.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들이나 개인적 입신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산 민주화운동권을 대표해 파견되어 간다는 인식이 있었다.


 노 변호사는 오래 산 남구를 포기하고 연고도 없는 동구를 고집했다. 그 지역구에 신군부의 5공 핵심 허삼수 씨가 나온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를 꺾어 5공을 심판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이겼고 정치에 입문했다. 그때 쓴 선거 구호가 ‘사람 사는 세상’이다. 이것은 이후 오래 동안,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한 뒤에도 즐겨 쓰는 사인 글이 되었다. 그만큼 사람 사는 세상은 쉬 오지 않는 꿈같은 것이었던지.


 나는 정치인으로서의 노무현, 그의 굴곡진 행로를 낱낱이 지켜본 사람이다. 그를 키운 건 국회의원 선수(選數)가 아니라 낙선 회수였다고 할 만큼, 떨어진 선거가 더 많았다. 정치를 당분간 접고 변호사로 돌아올 것을 권유한 적도 있었지만, 일단 정치에 발을 담근 그는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딱 한번 그만둘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종로 지역구를 버리고 부산 강서에 출마했을 때였다. 본인 스스로도 이번에 떨어지면 정치 그만 두겠다고 했다. 그는 떨어졌다. 

 하지만 지역구도에 온몸으로, 줄기차게 맞서는 그의 모습에 감동한 국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국적인 지지가 몰려들었고 이 힘이 근거가 되어 결국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비운으로 가시고 나니 처음부터 말렸어야 했다는 회한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노무현 변호사가 초선의원으로 5공 청문회의에서 맹활약을 보이는 등 정치인으로 성장해 갈 때 나는 부산에 혼자 남아 노동관련 사건 변호에 매달렸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늘 행복했다. 일이 많아 힘들었지만 내 삶에서 가장 안정된 시기였고 나의 개인적인 삶과 세상을 향한 나의 의무감이 나름대로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충만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동의대 사건 재판과 신 씨 일가 간첩단 사건의 변론이었다. 1995년 법무법인 부산을 설립했고, 나는 주로 노동운동이나 노조활동을 지원하는 단체 쪽 일에 집중했다. 이때 관여하거나 함께 만든 단체들로는 부산 노동문제 연구소, 부산 노동단체협의회, 노동자를 위한 연대 등이 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11]

 

2002년 대선


 

국회의원 노무현의 지역주의와의 싸움은 참으로 가열했다. 자신의 유, 불리를 따지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히는 그의 진정성을 국민들이 알아주기 시작했다. 그는 15대 총선 때 처음으로 대선 출마 의지를 내보였다. 그리고 2001년 9월 6일, 드디어 대선 출마를 공식선언하기에 이른다.


 그의 대선행보는 남달랐다. 조직과 돈을 먼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 전문가들로 학습 팀을 꾸려 국정운영에 대한 공부부터 시작했다. 참으로 노무현다운 준비였다. 후보 경선이 시작되었고 나는 부산, 울산 지역 경선을 책임지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워낙 노동운동이 활발하던 지역이라 그간 우리가 각급 노조와 맺은 끈끈한 유대와 인맥이 큰 힘이 되었다. 다들 기억하고 있을 ‘광주 경선의 감동’을 넘어 그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나는 다시 부산 선대본부장을 맡았다. 이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란 말이 나왔다. 나를 정치판에 끌어들인 사실이 미안했던지 노 대통령께서 어떤 행사에서 나를 추어주기 위해 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담긴 그의 속 깊은 우정에 대해 언제나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비록 과분하긴 하지만 지금도 그 말을 가장 듣기 좋은 칭찬으로 여기고 있다.


 그의 대선 가도는 참으로 험난했다. 후보가 되고 난 뒤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지지율이 하락했다. 당내의 후보 흔들기, 후보교체론에 이어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다. 가장 힘든 시기였고 절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그는 모든 것을 뚝심과 배짱으로 정면 돌파하며 꿋꿋하게 버텼다.

 분수령은 정몽준 씨와의 후보단일화였다. 지지율이 뒤지는 상황에서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 방식은 매우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나는 후보단일화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 방식을 받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말씀드렸다. 당내에서는 걱정이 많았지만 오히려 불리함을 무릅쓰고 이런 방식을 담대하게 수용한 노 후보에 대해 국민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난관은 또 있었다. 정몽준 씨 측에서 연합정부, 사실상 권력의 절반을 요구하며 그것을 명문화해 달라고 했다. 장관 자리를 어떻게 나눌지를 특정하자는 것이었다. 받지 않으면 판을 깬다는 식이었다. 당내에서는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라도 우선 받으라고 압박했다. 노 후보는 매우 힘들어하면서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때 나는 “우리가 살면서 여러 번 겪어 봤지만, 역시 어려울 때는 원칙에 입각해 가는 것이 정답이다. 뒤돌아보면 그것이 언제나 최선이었다. 당신이 옳다.”고 말씀드렸다. 외로우셨던지 나의 지지의사를 듣고 노 후보는 매우 기뻐했다.


그런 선거가 또 있을까. 투표 전날 밤, 정몽준 씨는 단일화 약속을 파기하고 지지를 철회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정몽준 씨를 직접 찾아가라고 종용했으나 노 후보는 잠을 잔다고 하니 내가 깨워서 설득 좀 하라고 전화가 오기까지 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 되던 날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날만큼은 나도 그 속에 휩쓸리고 싶었다. 아름다운 밤,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싶은 순간이었다. 그때로서는 앞으로 겪게 될 고난은 생각지도 못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12]


참여정부 민정수석



 참여정부 시절 나는 민정수석, 시민사회 수석, 다시 민정수석을 거쳐 비서실장을 지냈다. 능력에 비해 과분한 자리들이었으나 나에게 맡겨진 책무를 다하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해 일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처음 민정수석 직을 맡아 달라 얘기했을 때 나는 그런 제안을 하는 그의 의중이 무엇인지, 내가 그 소임을 맡게 되면 그가 하려는 개혁을 도울 수 있을까를 깊이 고민했다. 노 대통령은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는 말씀까지 했다. 내가 대답했다. “나는 정치를 잘 모르니 정무적 판단능력이나 역할은 잘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리원칙을 지켜 나가는 것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를 쓰십시오.” 그리고 덧붙였다. “민정수석으로 끝내겠습니다.” 그리고 “정치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나의 청와대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참여정부의 첫 내각 인선이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업무 특성상 민정수석실의 검증을 필요로 하는 일이어서 사실상 나의 첫 당면과제였다. 특히 내각의 사회분야 쪽엔 상당부분 깊이 관여했다. 첫 조각은 파격 그 자체였다. 나는 개혁적 인사들이 일거에 내각과 청와대를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당선인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고영구 국정원장, 이용섭 국세청장 등의 기용은 그런 내각의 성격을 잘 말해주었다.



 평창동의 작은 연립에 세를 얻어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마당이 100평이 넘는 부산 집을 팔아도 강남 30평 아파트 전세 값이 안 됐다. 근무 시간이 길어 사생활이 크게 없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이전 생활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하긴 달라질 이유가 없었다. 업무 시간 외에는 내가 직접 차를 모는 것, 방이 따로 없는 대중음식점에서 밥을 먹는 것, 사람들 틈에 섞여 줄서서 기다리는 것, 비행기나 기차의 일반석을 이용하는 것, 수행원 없이 혼자 다니는 것 등, 나로서는 당연한 일들을 많은 사람들이 신기하게 받아들였다. 기왕의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이미지와는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다. 참여정부의 인사들은 대개가 그랬기 때문에 일요일 혼자 간 등산길에서 서로 마주치기도 했다.


 청와대 생활은 힘들고 고달팠다. 업무량이 한계용량을 늘 초과하는 느낌이었다. 언제나 잠이 부족했다. 심지어 치과치료를 받느라 드릴이 어금니를 긁어내고 있는 상황에서도 졸음이 쏟아졌다. 이렇게 무리를 하다 보니 민정수석 1년 만에 이를 열 개나 뽑아야 했다.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민정수석실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다. 재미있는 것은 이를 뺀 개수가 직급에 따라 차이가 났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업무연관성에 대한 분명한 증거라고 우스갯소리를 나누기도 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13]


히말라야로 떠나다



  2004년 2월 12일, 나는 민정수석을 사퇴했다. 내 의사와 무관하게, 총선에 나가야 한다는 ‘징발론’이 당에서 제기되었다. 이해 할 수 있는 요구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나의 원칙주의를 불편해 했던 당의 인사들이 차제에 나를 청와대대에서 내보내려는 의도도 일부 깔려 있었다. 


 출마에 뜻이 없었던 나는 아예 민정수석 직을 그만두기로 했다. 건강상의 이유를 핑계로 사의를 표명하고 2004년 2월 12일에 정식으로 민정수석을 사퇴했다. 청와대 들어온 지 1년 만의 해방이었다. 대통령과 안에서 고생하는 분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처럼 꿈같은 자유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났다. 안나푸르나가 목적지였다. 해발 3,500까지 올라서 산간마을을 순회하는 코스를 택했다. 체력이 형편없이 떨어져서 아주 고생을 했다. 포터를 한 명 고용했는데 자그만 체구의 그가 혼자 짐을 다 지고 가는 것이 안쓰러워 10kg쯤 되는 짐을 떠맡았다가 트래킹 내내 어찌나 무거운지 죽을 고생을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남자의 체면이 있지, 하는 심정에 중간에 되돌려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내에게 지울 수도 없어서 참 힘들었다. ‘사서 고생’, 딱 그 경우였다.


 

 그리고 이 트래킹 여행 중에 담배를 끊었다. 땀 흘리며 산길을 걷다가 전망 좋은 곳에서 쉬면서 피우는 담배의 꿀 같은 맛을 잘 알고 있어서 무척 아쉽기는 했지만, 워낙 공기가 깨끗해서 그곳에 담배연기를 내뿜는다는 게 죄를 짓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가 있었다. 트래킹 내내 그렇게 힘들었던 데에는 아마도 금단증세도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14]


탄핵 대리인



 트래킹 여행 중 카트만두에 도착해 쉬고 있을 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식을 들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신문 International Herald Tribune을 읽으며 아침을 먹고 있는데 ‘South korea President Roh impeached’ 란 제목이 눈에 띄었다. 취임 한 달이 채 안 됐을 때부터 탄핵 운운하던 한나라당이었기 때문에 이번도 정치공세일 것으로 생각했으나 말로만 하던 것과는 달리 탄핵소추안을 발의까지 했다면 정국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행을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탄핵 결의안은 국회를 통과했고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 되었다. 노 대통령은 탄핵 대리인단 구성을 비롯해 법적 대응 전반을 맡아 달라고 부탁해 왔다. 나는 변호사 개업신고부터 내고 대리인단 구성에 착수했다. 중립적이면서도 명망과 실력을 두루 갖춘 분들을 모시고자 했다.





 그 결과 지금 생각해도 당시 우리가 갖출 수 있는 최고의 진영을 갖출 수 있었다. 유현석 변호사가 좌장 역할을 맡았고, 한승헌 변호사가 총괄 역할을 자임했다. 나는 대리인단의 간사로서 실무적 역할과 함께 홍보를 맡았다. 

 탄핵 재판 중에 있었던 촛불집회에도 자주 참석했다. 민의가 곧 헌법이라면 그 일 또한 재판 준비에 값하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 치러졌던 17대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차지함으로써 단독으로 원내 과반수 정당이 되었다. 탄핵에 대한 민심의 엄중한 심판이었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졌다. 당연히, 기각이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15]


마지막 비서실장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 노 대통령이 다시 나를 불렀다.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마지막 비서실장은 퇴임 후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자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맡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워낙 힘들었다. 그럴수록 마무리가 중요했다. “그래 우짜겠노. 대통령과 마지막을 함께 하자.”라고 생각했다. 비장한 각오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원칙과 초심과 긴장을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취임사에서 세 가지를 당부했다. 참여정부의 성공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분명히 갖자,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까지 하루도 헛되이 보내는 만만함이 없어야 한다, 끝까지 도덕성을 지켜 나가자. 직원들은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퇴임 일까지 해줬다고 생각한다.



 임기 마지막 해인데도 정치적 이슈들이 끊이지 않았다. 원 포인트 개헌(대통령 임기와 국회의원 임기를 일치시키는 내용만 따로 떼어서 개헌하는 것) 제안이라든지 기자실을 개방형 브리핑 룸으로 확장 통합하는 일 등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이해관계와 언론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 것이 못내 아쉽다.


 임기 말까지도 청와대는 여전히 분주했다. 역대 청와대의 임기 말 모습이었던 ‘완전히 손을 놓는 분위기’나 ‘개점휴업 상태’와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우리가 끝까지 도덕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우리는 누가 뭐하고 하든, 우리가 해야 될 일을 로드맵에 따라 원리원칙대로 묵묵하게 해 나갔을 뿐이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16]


남북정상회담



 비서실장을 지내는 동안 가장 보람 있고 컸던 일은 2007년 10월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참여정부는 임기 내내 북핵문제로 시달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확실한 원칙을 단호하고도 일관되게 밀어붙였다. 대통령의 뜻이 워낙 강하다 보니 공화당 부시 행정부도 결국 대북 강경일변도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로 가닥을 잡았다.


 이에 우리도 이라크 파병을 통해 미국에 성의를 보이는 등 신뢰를 쌓았다. 그리고 이런 바탕 위에서 6자 회담의 틀을 마련해 완전한 비핵화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해 졌으니 이는 긴 과정동안 끊임없이 인내하면서 북한과 신뢰를 쌓아나간 결실이었다.


 정상회담이 열리기까지에는 참으로 많은 사연들이 숨어있다. 2005년 6월, 6.15 공동선언 5주년을 맞아 대통령은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을 특사로 평양에 보내 김정일을 만나게 했다. 정 장관이 지참한 친서에는 ‘6자회담을 조기에 재개하고 그 성과를 이어받아 정상회담을 열고 싶다는 대통령의 의중과 모든 내용을 대통령을 대신한 특사와 허심탄회하게 의논해 달라’는 당부가 들어 있었다.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9.19공동성명이 채택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하지만 미국이 북한의 유일한 외환 결제 창구(BDA)를 동결해 버리는 조치로 9.19 공동성명을 무색하게 만들자 정상회담 준비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6년 11월 김만복 국정원장이 취임해 정상회담 추진 의지를 밝혔고 2007년 5월에는 백종천 안보실장까지 8.15 이전에 반드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계획을 보고하면서 회담 준비는 다시 급물살을 탔다. 비서실장인 나, 국정원장, 안보실장이 이를 추진하고 준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매주 목요일 정기적으로 만났다. 우리는 이를 ‘안골 모임’이라 불렀다.


 그해 7월 말쯤에 북측에서 모종의 연락이 올 것 같다고 해서 중순부터 기대를 갖고 기다렸다. 하지만 7월 17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샘물교회 목사, 신도들이 텔레반에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해 백종천 실장은 현장으로, 나는 인질사건의 해결을 관장하기 위해 동분서주 할 수밖에 없었다.


 7월 말에 북한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을 때, 인질사건만 없었더라면 내가 특사로 갈 예정이었지만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고, 김만복 원장이 북한을 방문해 정상회담 추진 합의를 하고 돌아왔다.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면서 실무적 준비에 들어가 드디어 8월 28일로 정상회담 일정이 도출되었다.

 대단히 촉박한 일정이었다. 일단 국민들께 그 사실을 알리고 청와대의 거의 모든 인력이 달라붙어 실무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번엔 북한에서 발생한 대규모 수해가 발목을 잡았다. 북측이 이를 이유로 회담연기를 요청해 왔던 것이다. 아쉬움이 컸지만 대신 더욱 알차게 준비할 시간을 번 셈이라 위안을 삼았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17]

노란 선을 넘어서



 회담이 결정된 이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문제 중 하나는 대통령이 어떤 방식으로 북한으로 가느냐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비행기로 가셨다. 우리는 남북관계의 진전을 촉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철도를 이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북한이 난색을 표했다. 개성 위쪽부터 선로가 시원찮은데 단기간에 보수가 힘들다고 했다. 남은 길은 육로였는데, 대통령이 육로로 군사분계선을 넘고 북한 주민이 보는 가운데 평양까지 차로 간다면 그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문제는 차량으로 군사분계선을 넘는 모습이 너무 밋밋할 것 같다는 점이었다.

 이때 실무협의팀에 있던 의전비서관실 오승록 행정관이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대통령이 걸어서 분계선을 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북측의 양해를 얻어 임시로 선을 긋고 그것을 걸어서 넘는다면 아주 인상적인 모습이 연출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 게 또 문제였다. 당시 노 대통령은 작위적인 이벤트나 연출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성과가 어떨지 알 수 없는 회담인데 마치 회담 자체가 성과인양 포장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총대를 맸다. “북측하고 이미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그때서야 마지못해 수락을 했다. 추후에 북측이 동의해 줘서 겨우 허위보고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일은 회담이 성공리에 끝나고 난 뒤에 좋은 추억거리가 되었다.



 대통령 내외분이 걸어서 노란 분계선을 넘는 모습은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그 장면은 10.4 정상회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 되었다. 대통령께서도 회담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그 장면에 대해 매우 만족해 했다.
환송 나간 우리는 대통령 내외분이 북측 사람들에게서 꽃다발을 받고 환영 받는 모습을 분계선 이남에서 지켜보았다. 온갖 감회가 밀려들었다. 우리는 대통령 일행의 모습이 북쪽으로 사라진 뒤, 우리도 군사분계선 한번 밟아보자며, 행여 그 선을 넘으면 시비꺼리가 될까 조심하면서 노란 선 위에 서서 기념촬영을 했다.


 정상회담의 성과는 굉장했다. 정상회담의 정례화 문제를 제외하곤 여러 분야에서 우리가 추진하고자 한 의제들이 대부분 합의문에 담겨 있었다. 어디 가서 혼자 만세삼창이라도 하고 싶었다. 감격스러웠다. 

 남북정상회담 전체를 두고 아쉬운 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회담이 좀 더 빨리 이루어졌어야 했다는 점이다. 미국 재무부의 BDA동결 조치 이후 그 문제를 풀기 위해 1년을 허송해 버린 게 너무 아쉬웠다. 만일 그 공백 없이 정상회담이 제때 열렸더라면 남북관계는 훨씬 많은 진도가 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아쉬운 문제는 국회비준동의를 받지 못한 일이었다. 참여정부의 임기가 많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다음 정부로 넘어가기 전에 회담 성과를 공고히 해두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법적으로 국가 간 조약의 성격을 띠는 남북정상 간의 합의는 그 내용이 국가나 국민에게 재정적 부담을 수반하는 경우에 해당되었다. 따라서 이런 합의에 대해서는 국회비준동의를 받아두어서 그 지속성을 확보하는 게 꼭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당시엔 유엔에서도 지지결의를 할 만큼 분위기가 좋았고 한나라당도 감히 정략적 반대를 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런데 당시 한덕수 총리가 끝내 안 했다.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후속 합의가 진행돼, 재정부담의 규모 등이 정해지면 그때 해도 된다는 논리였다. 그러다가 결국 실기(失期)하고 말았고 정권이 바뀌면서 정상 간의 소중한 합의는 내팽개쳐지고 말았던 것이다. 민족의 불운이 아닐 수 없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18]

그해 겨울



 대선이 끝나고 본격적 퇴임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 두어 달 동안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식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냈다. 우리는 차기 정부를 위해 여러 일을 성심껏 챙겼다. 특히 방대한 기록물을 정리해 넘기는 작업이 그랬다. 우리가 한 일을 역사에 남기는 차원이기도 했지만 당장 차기 정부에 꼭 필요한 일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국정의 연속성에 비효율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진심이었다.

 참여정부의 인사검증 매뉴얼도 다시 보완하고 업그레이드해서 넘겼다. 이 매뉴얼이 다시 만들어진 게 2008년 2월, 그야말로 퇴임 직전이었다. 다음 정부를 위해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검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인사에서 망신을 산 경우는 역대 정부가 다 그랬고 참여정부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임기 내내 인사 검증 매뉴얼을 발전시켜 왔고 차기 정부에서 잘 활용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음 정부가 하려들면 뭔가 찜찜하거나 시간이 많이 걸리고 예산도 부담이 되는 일들은 가급적 다음 정부가 넘겨받지 않도록 애를 썼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통령 전용기 도입 문제였는데 알다시피 이것은 한나라당의 반대로 미뤄져버렸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차려준 밥상을 걷어찬 경우였다. 
 각종 제도적 불비사항 등도 서둘러 보완했다. 심지어 청와대 내 작은 간이 목욕탕 수리, 관저로 올라가는 산책로 주변 단장 등 사소한 것들도 정비를 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이 모든 게 허망한 일이었다.

 재임 기간 중의 기록물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마무리해서 가급적 남김없이 이관하는 일은 방대한 작업이었다. 그 작업을 내가 진두지휘 할 수밖에 없었다. 비서실 직원들은 몇 주일 밤을 새야 할 지경이 되자 “제대 말년의 생고생”에 대해 불만을 털어 놓기도 했다.

 한편으론 퇴임 이후 준비로도 바빴다. 여러 가지 검토 끝에 대통령은 퇴임 후 고향인 봉하마을로 돌아가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2006년 하반기 쯤에 작고하신 정기용 건축가의 설계로 사저도 지어 놓았다. 건축비는 은행 대출로 충당을 했는데 퇴임 후 책을 쓰거나 강연 수입 등으로 갚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 개인적으로도 슬슬 퇴임 이후를 준비했다. 서울에 남는 것은 애당초 생각하지 않았다. 부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했지만 딱히 부산보다는 부산 근교의 시골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건만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어 심신이 워낙 지치기도 했고 마음도 많이 상해서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는 혹독했다. 대통령의 지지는 낮았고 당은 깨졌다. 정권 재창출에서 참담한 실패를 했다. 진보진영 전체가 한꺼번에 추락했다. 당연히 국정을 맡은 우리 책임이 제일 컸다. 세상과 거리를 두면서 조용하게 살고 싶었다. 스스로를 유배 보내는 심정이기도 했다.

 경제적인 사정도 있었다. 원래 저축해 놓은 것이 많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청와대에 있는 동안 다 까먹었다. 생활 때문에 변호사를 그만 둘 수는 없어 출퇴근이 가능한 곳을 찾다보니 양산 매곡을 고르게 된 것이다.
 양산에서 살게 되면 대통령 계신 봉하는 가끔씩 가보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마지막 비서실장을 했기 때문에 퇴임 대통령으로 치러야 하는 공식적인 행사에 수행하거나 혹은 배석이나 하면 될 줄 알았다. 그토록 자주 가게 될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19]

고향으로 돌아오다


 마지막 며칠은 떠나는 일로 분주했다. 함께 수고해 준 수석, 비서관, 행정관, 행정요원, 여직원들과 일일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남들은 청와대에 있다고 하면 대단한 자리에라도 있는 양 생각했겠지만 ‘노무현의 청와대’여서 더욱 조심하고, 더 참고, 더 욕먹고, 하지만 그래서 더욱 열심히 일했던, 눈물이 날만큼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고작 사진 찍는 일 밖에 없었지만 언젠가 사진을 보며 자랑스러운 추억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생각했다.

 2008년 2월 24일 밤, 대통령이 차관급 이상 모두를 초대해 베푼 만찬을 마치고 아내가 먼저 짐을 싸서 양산으로 내려간 바람에 더욱 을씨년스러운 공관으로 돌아와 지난 세월과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해 생각하면서 참여정부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서글픈 상념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변변한 이임식도 없이 차기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임기를 마치는 우리의 퇴임 문화는 너무 척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대통령 내외분을 모시고 관저의 문을 나서는데 청와대 직원들이 관저에서부터 정문까지 꽤 긴 거리에 모두 도열해서 환송해 주었다.

 취임식 행사를 마치고 KTX를 타기 위해 서울역으로 갔을 때 환송 나온 수많은 인파 가운데 하염없이 울고 있는 분들이 눈에 띄었다. 중국 동포들이었다. 2003년이던가, 자신들의 어렵고 힘든 처지를 호소하며 단식농성을 하고 있을 때 대통령은 법무부 등 여러 곳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그들을 찾아가 격려한 적이 있었다. 격에 맞지 않는 일정이었지만 고립무원한 그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무엇보다 필요하리라 생각한 대통령의 속 깊은 마음 씀씀이였다. 그 고마움을 못내 잊지 못해 그들이 나온 것이었다. 그 누구의 환송보다 마음에 남았다.
 기차간에는 참여정부의 많은 인사들이 함께 탔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대통령이 말렸지만 그들은 대통령이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이 쓸쓸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밀양에 내렸을 때도 그랬지만 봉하마을에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었다. 그들을 향한 인사말 끝에 대통령이 크게 외쳤다. “야, 기분 좋다!” 나도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야, 나도 해방이다!”

밤늦게 도착한 양산 집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마지막 날까지 바삐 일하는 통에 이사 할 집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는데 수리가 덜 끝난 바람에 잠잘 곳마저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해방감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20]

시골생활

 노무현 대통령은 봉하에서, 나는 양산에서 각각 시골 생활을 시작했다. 봉하는 연일 방문객들로 넘쳐났다. 방문객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대통령을 불러냈다. 그들을 상대로 친환경 농업, 숲 가꾸기, 화포천 살리기 등을 주제로 얘기하는 대통령의 얼굴엔 그렇게 생기가 넘칠 수 없었다.


 또한 대통령은 소박한 시민이자 전직 대통령으로서 뭔가 나라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을 구상했다. 나는 양산에서 있으면서 가끔 봉하에 들렀다. 격식을 갖출 필요가 있는 자리에 배석하기도 하고 공식행사에 수행하기도 했다. 갈 때마다 좋았다.

 양산에서 꾸려가는 내 생활도 만족스러웠다. 비록 집수리가 덜 돼서 거의 한달 반가량을 계곡 옆 별채의 단칸방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며 세수는 계곡에서, 볼 일도 밖에서 해결하는 유배생활이었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거의 외출도 하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 개와 고양이, 닭의 먹이를 챙겨주고 똥을 치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 조그만 텃밭을 가꾸며 운동보다는 노동으로 하루를 보내는 서툰 농사꾼의 생활이 마냥 좋았다.


 하지만 봉하와 양산의 이런 소박한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시작조차 못했거나 흐지부지된 대통령의 구상들, 봉하에 방문객들이 날로 넘쳐나는 현상, 퇴임 이후 인기가 더 올라가는 기이한 대통령-이런 일들이 하나같이 이명박 정권에게는 정치적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이후 시작될 불행한 사태의 전조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21]

정치보복


 이 시기를 떠올리는 것은 지금도 고통스럽다. 온갖 회한이 가슴을 짓누른다. 워낙 억울하게 매도당하는 일이 많아 한때는 법률적 대응 외에 정치적 대응을 할까도 생각했었다.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정치적 저의에 대해선 짚고 넘어가면서 정면으로 대응하는 방식을 검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론이 귀 기울여 주지 않으리라는 판단과 더 혹독한 비난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해 오직 인내하면서 철저하게 법률적으로만 대응하려 했다. 

 그러한 우리의 판단이 과연 옳았던 것인가…. 대통령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대변하면서 정면으로 부딪혀 보았더라면…. 물론 그랬으면 더 나았을지, 대통령이 더 후련해 하고 더 힘을 내게 됐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모든 것을 당신의 책임으로 떠안으려 했던 대통령의 속마음 알았으면 우리라도 몸부림을 쳐봤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후회가 많이 남는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전국에서 촛불시위가 벌어졌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대단히 신중하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줬다. 참여정부에 책임을 전가하는 이명박 정부와 당국자들의 발언이 연이어 터져 나와 마음이 상했을 텐데도 그는 언제나 현직 대통령을 존중하고 배려했다. 촛불시위의 배후로 우리를 의심했다는 얘기를 한참 후에 듣고 정말 놀라운 상상력이고 피해의식이라 생각했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이미 정치보복의 칼끝이 우리를 향해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 시작은 참여정부 사람들에 대한 뒷조사였다.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뒷조사가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와 이병완 전 비서실장,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의 주변 인물들을 대놓고 잡아들이며 약점을 캐고 있다는 애기가 속속 들려왔다.

 그리고는 슬슬 대통령에게 칼끝이 겨눠지기 시작했다. 대통령 기록물을 둘러싸고 망신주기가 시작됐다. 역사상 가장 많은 기록물을 남기고 이관한 대통령을 ‘기록물을 빼돌린 파렴치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코미디였다. 내가 그쪽의 류우익 비서실장과 통화해 사실관계를 설명해 주기도 했고 정상문 총무비서관이 그쪽 김백준 총무비서관에게 보충설명을 상세히 해줬다. 그땐 그 사람들도 우리 설명을 듣고 대체로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이 자신의 재임 중 기록물을 제대로 열람할 수 있도록 방도만 마련하면 간단히 풀릴 사안을 두고 일을 풀려고 하기는커녕 사건을 만들어 가는 방식을 택했다. 야박하게도 중대한 위법행위인양 몰아갔던 것이다. 

 워낙 법률적으로 명명백백한 사안이어서 법률적 시시비비를 단단히 따져볼 애초의 생각을 접고 대통령은 결국 그쪽이 요구하는 아주 굴욕적인 방식으로 백기를 들었다.

 이일을 겪으면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확실히 챙기겠다”던 이명박 대통령의 말은 진심이 아니며, 이전 정부 탓으로 떠넘기는 정치적 차원을 넘어 상당한 악의를 갖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확연히 갖게 되었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22]

 비극의 시작


 그런 느낌이 사실로 확인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통령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과 그들의 기업이 표적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들병원 이상호, 김수경 회장이 세무조사를 받은데 이어 창신섬유 강금원 회장은 끝내 구속되고 말았다. 2008년 7월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가 시작되었다. 검찰수사가 세종증권 매각비리로 확대되면서 대통령 형님 노건평 씨가 수사 타깃이 됐다. 나중에야 모두 알게 되었지만 형님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사실 형님 문제는 청와대에 있을 때부터 각별히 신경을 썼던 일이라 아차, 싶었다. 세종증권 문제와 박연차 씨 문제도 안 좋은 낌새가 있긴 했다. 이런저런 불미스런 얘기가 나돌 때 민정수석실의 특감반이 조사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기업 쪽에서도, 노건평 씨 쪽에서도 매우 강력하게 부인했다. 절대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청와대는 수사권이 없어 더 이상 파고들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단서가 있었거나 형님이 사실대로 얘기해 줬더라면 결코 덮고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제기했을 일이었다. 구속이 임박해 검찰이 영장을 청구할 때엔 이미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수준이 아닐 만큼 형님은 그 일에 고약하게 엮여 있었다. 아예 모르고 터진 일이라면 아쉬움이라도 없을 텐데 첩보를 입수하고서도 더 파헤치지 못했으니 너무도 아쉬웠다.

 형님에 이어 정상문 총무비서관마저 불미스런 일로 엮여 구속되었다. 이 역시 박연차 회장이 고리였다. 대통령께 큰 실수를 하게 된 권 여사님은 우리에게 너무 면목 없어 했다. 사건 파악을 위해 우리와 논의하는 자리에는 어쩔 수 없이 동석했지만 그게 아니면 대통령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걸 피했다. 
 그 시기 대통령은 좀 이상했다. 당시 대통령도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모르다가 우리가 권 여사님께 따져 물으며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걸 곁에서 지켜보면서 내용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평소 같으면 굉장히 화를 내고 야단을 치실만도 한데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보였다. 도저히 달관할 수 없는 일을 달관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게 내 책임이다. 내가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무능했고 장래에 대한 아무런 믿음을 못주니 집사람과 정상문 비서관이 그렇게 한 게 아니겠는가. 다 내 잘못이다. 나는 오래 정치를 하면서 단련이 됐지만 가족들은 단련시키지 못했다.”

 대통령은 우리를 보는 일조차 민망해 하고 면목 없어 하셨다. 나는 결벽증이라고 할 만큼 자신에게 가혹했던 분이 당시 상황을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그저 딱하고 적정이 됐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무죄가 되리라는 확신으로 버텨나가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검찰과 언론이 한 통속이 돼서 벌이는 여론재판과 마녀사냥은 견디기 힘든 수준이었다. 홍만표 수사기획관이 아침저녁으로 공식 브리핑을 했다. 중수부장 이하 검사들도 수시로 언론에 수사상황을 흘렸다. 검찰 관계자라는 속칭 ‘빨대’가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했다. 언론은 이 모든 것을 사실 확인 없이 고스란히 중계하며 기꺼이 그 공범이 되었다. 무엇보다 아팠던 것은 진보라는 언론들이었다. 기사는 보수언론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칼럼이나 사설이 어찌 그리 살점을 후벼 파는 것 같은지 무서울 정도였다.

 그에 비해 우리 쪽은 대응할 수단도 사람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언론대응을 맡았는데, 변호사 사무실을 오가면서, 때로는 봉하에 오가면서 기자들의 전화취재에 일일이 응대했다. 그 무렵 언론에 보도된 내 답변의 대부분은 운전 중에 이뤄진 것이다. 생각이나 말에 순발력이 있는 편이 못되는 내가 언제나 노심초사하며 대응했지만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후회가 많이 남는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23]

 치욕의 날


 2009년 4월 30일, 노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대검 청사로 출석하게 되었다. 치욕스런 날이었다. 여사님은 아무 말도 없이 눈물을 참고 있었고 대통령은 담담했다. 그를 격려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위로는커녕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오히려 대통령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실없는 농담을 건넸다. 대통령이 사저를 나설 때,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모님이 결국은 무너지고 말았다. 대통령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여사님을 다독였다.


 대검 청사에서 이인규 중수부장이 대통령을 맞이했다. 그는 대단히 건방졌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그의 태도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중수 1과장이 조사를 시작했다. 대통령은 차분하게 최선을 다해 꼬박꼬박 답변을 했다. 놀라운 절제력이었다.

 나는 조사를 지켜보면서 검찰이 아무 증거가 없다는 것을 거듭 확신할 수 있었다. 박연차 회장의 진술 말고는 증거가 없었다. 심지어 통화기록조차 없었다. 그게 없다는 것은 통화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었다. 박연차 회장과 대질을 시키겠다는, 검찰의 대단한 무례도 대통령은 참아냈다. 
 서로의 진술이 다르면 객관적 증거로 누구 말이 맞는지를 가리는 게 검찰의 일일진대 그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변호인단의 거부로 대질은 무산 되었지만, 오래 기다린 그를 만나 인사라도 나누시라고 해서 결국 박 회장을 조우하게 됐는데 대통령은 그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그 상황에서도 그를 위로했다.

 조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은 정적만 흘렀다. 거기까지의 과정이 힘들어서 그렇지 막상 기소 이후엔 무죄를 자신했다. 검찰과 언론이 아무리 ‘여론재판’이나 ‘정치재판’을 해도 법은 법이다. ‘사실’이 갖고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무리한 수사나 조작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 사건이 그랬다. 이길 수 있었다. 대통령도 그런 차원에서 ‘진실의 힘’, ‘명백한 사실이 갖고 있는 힘’을 믿었다.

 검찰 조사라는 마지막 절차가 끝났지만 검찰은 질질 끌기만 할 뿐,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들도 공소유지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영장을 청구했다가 기각되면 그동안의 그 요란한 수사는 모두 무너져버린다. 불구속기소를 해도 공소유지가 쉽지 않고, 무혐의 처리를 하자니 그것도 마땅찮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아무 처리도 못하고 끌기만 한 것이다. 언론을 통한 모욕주기와 압박 외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은 어쩌다 그런 곤경에 처하게 됐을까. 나는 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가난했다. 가난이 그를 공부에 매달리게 했고, 가난이 그를 인권변호사의 길로 이끌었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돕겠다고 소박하게 시작한 일의 연장선상에서 정치를 하게 되었고 그런 진정성이 그를 결국 대통령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빈곤은 아니라 할지라도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살 집도 대출을 받아 지었다.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도 빌리게 됐다. “나 자신만 정치적으로 단련되었지, 가족들을 정치적으로 단련시키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털어 놓은 그는 재산보다 4억 원 가량 많은 부채를 남기고 서거하고 말았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24]

 상주 문재인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지,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대통령의 참혹한 마지막 모습을 그대로 본 내가 사태 경과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일이었다. 

 나 자신부터가 밀려드는 자책감을 견딜 수 없는 마당에 내가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상황이 더더욱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를 장사지내는 상주가 되어야만 했다. 시신확인에서부터 운명, 서거발표, 그를 보내기 위한 회의주재까지, 나 혼자 있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했다. 그렇게 길고 긴 5월 23일 하루가 넘어갔다. 내 생애 가장 긴 하루였다. 그날만큼 내가 마지막 비서실장을 했던 게 후회된 적이 없었다.


 그분이 혼자만의 고통스럽고 고독한 시간을 견디며 마지막 결심을 굳힐 때까지 나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함께 있어드리지 못했다. 유서를 처음 본 충격이 어느 정도 가셨을 때 나를 못 견디게 했던 건, 이분이 ‘유서를 언제부터 머리에 담고 계셨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컴퓨터 화면에 띄워놓고 다듬을 수 있는 글이 아니므로 대통령은 아무도 몰래 머릿속에서 유서를 다듬었을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에게 신세를 졌다”는 첫 문장은 나머지 글을 모두 입력한 후에 추가로 집어넣은 것이었는데, 그답게 마지막 순간에도 스스로의 유서를 다시 읽고 손을 본 것이다.

 대통령이 마지막 얼마동안 머릿속에 유서를 담고 사셨으리라는 생각은 지금도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나는 지금도 그분의 유서를 내 수첩에 갖고 다닌다. 별 이유는 없다. 그냥 버릴 수가 없어서 그럴 뿐이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25]

 그를 떠나보내며


 봉하에 마련된 빈소에는 상상도 못할 인파가 밀려들었다. 그 많은 분들이 단 1~2분의 조문을 위해 몇 시간을 달려와 또 몇 시간을 기다렸다. 그 뜨거운 뙤약볕도, 갑자기 쏟아진 폭우도 그 행렬을 흩어놓지 못했다. 장엄한 종교의식을 보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거기까지 오게 만들었을까….

 장례문제를 논의하면서 선택해야 할 일이 많았다. 많은 논란을 거쳐 하나하나 결정해 나갔다. 국민장이냐 가족장이냐를 비롯해서 정부 측과의 장의위원회 구성하는 문제를 두고도 여러 차례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영결식 장소, 노제와 운구 행렬의 장소, 장지 등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결정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봉하 내에서 묘역을 어디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결국 ‘국민적 추모의 공간’에 중점을 두고 지금 장소를 선택했다. 처음부터 국민 참여 방식의 박석 형태를 염두에 두고 내린 결정이기도 했는데 비극의 장소인 부엉이 바위가 빤히 바라보이는 것을 여사님이 영 마음에 걸려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다행인 것은 지금의 형태로 완성된 후엔 모두 흡족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봉화산 사자바위에서 묘역을 내려다볼 때면, 그 장소가 원래부터 대통령의 묘소로 예정돼 있던 운명적 장소 같다는 생각을 한다. 땅 모양이 삼각형 형태여서 봉화산에서 흘러내린 지세가 수반이 있는 꼭짓점을 접점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간인 봉하마을과 절묘하게 연결되지 않는가! 진작 그렇게 예정돼 있던 것일까, 운명의 조화를 누가 알아챌 수 있을까.

 큰 가닥이 잡힌 후엔 정부의 협량한 태도가 우리를 어렵게 만들었다. 서울광장의 노제를 반대했고 만장까지 문제를 삼았다. 시민들의 감정이 격해져 대규모 시위로 번질 것을 두려워했고 만장 깃대가 시위용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격앙된 민심 앞에 벌벌 떠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나 영결식을 위엄 있고 질서 있게 엄수하려는 것은 그들보다 우리가 더 원하는 일이었다.

 끝내 정부가 못하게 막은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영결식 추모사였다. 내가 그것을 제안했을 때 모두가 찬성했다. 워낙 건강이 안 좋으셔서 하실 수 있을까 염려하면서도 일단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승낙하셨다. 하지만 뜻밖에도 정부가 거부를 했다. 그 이유가 참으로 궁색했다. 전례가 없다는 것과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부 측의 거부로 영결식 추모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영결식 전날 불편한 몸으로 휠체어를 타고 서울역 분향소를 방문해 추모 말씀을 해주셨다.
“노무현 당신, 죽어도 죽지 마십시오”로 시작해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로 끝나는 간절한 추모사였다. 얼마나 감사한 마음이었는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26]

 눈물의 바다


 영결식은 거대한 슬픔의 바다였다. 나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영결식을 준비하는 며칠 동안 나는 한 순간이라도 내 슬픔을 드러낼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한명숙 전 총리의 “대통령님! 대통령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라는 애절한 추도사를 듣는 순간 봇물 터지듯 눈물이 쏟아졌다.

 이명박 대통령의 헌화 순서 때 분노를 참지 못한 백원우 의원이 ‘정치보복 사죄하라’고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마음인들 오죽했으랴,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나는 상주로서 사과해야 할 일이었다. 영결식이 끝날 때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의 자격으로 나는 그에게 사과했다. 이대통령도 “괜찮다. 이해한다. 개의치 마라”고 화답했다. 그러나 검찰은 나중에 끝내 백 의원을 장례식방해죄로 기소했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오열하던 모습을 기억하시리라. 나는 가까이에서 너무도 생생하게 그 장면을 목격했다. 헌화를 마친 김 대통령께서 여사님을 위로하기 위해 다가와서는 슬픔과 비통함을 못 이겨 아이처럼 엉엉 우셨다…. 
 얼마 후 김 대통령마저 돌아가시자, 병마가 깃든 노구를 이끌고 오신 것만도 건강에 크게 해가 됐을 텐데 그처럼 마음마저 무너진 것이 어쩌면 그분의 서거를 재촉한 게 아닌가 싶어 죄스럽고 안타까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노제를 지낼 서울광장을 향해 운구 행렬이 나아갈 때 수많은 추도 인파로 인해 행렬은 더디고 더뎠다. 평범한 서민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운구차에 손이라도 대보려고 안타까이 몰려드는 모습을 보고 그가 얼마나 서민들의 사랑을 받은 대통령이었는지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서울 광장에서 열린 노제에는 50만이 넘는 인파가 함께 했다. 모두가 하나 되어 노래 부르고, 소리치고, 함께 울었다. 나는 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무대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분위기만 느낄 뿐이었다. 하늘에 신비한 오색 채운(彩雲)이 길게 드리워져 그의 영면을 비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나 애절한 마음이 모이면 그것이 기(氣)가 되어 그런 신비로운 현상을 빚어내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제가 끝나고 다시 운구 행렬이 움직일 때도 시민들이 운구차량을 한사코 붙잡고 또 붙잡았다. 그들의 애절한 마음이 아파서 속도를 낼 수도 없었다. 서울역을 지나서야 비로소 인파와 헤어졌는데 내가 대표로 시민들께 인사를 드렸다. “너무 고맙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을 마치고 유골을 수습해 봉하마을 정토원에 모신 건 다음날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였다. 자정을 넘기면 안 된다는 속설에 따라 시간을 맞추려 노력했지만 추모인파와 헤어지는 게 그리 어려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국민장이 끝났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27]


 그가 떠난 자리



 노무현 대통령이 모든 번뇌와 시대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저 안식과 자유를 누리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안장식을 준비했다. 불교계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어 49재를 지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묘역 조성은 문화예술계의 전문가들이 기꺼이 맡아주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서서 ‘아주 작은 비석위원회’를 구성했다. 유홍준 교수, 역사학자 안병욱, 건축가 승효상, 미술가 임옥상과 안규철, 조경 정영선, 그리고 황지우 시인 등으로 짜여진 드림팀이었다. 그 분들 덕분에 오늘의 묘역이 이렇게 아름답게 꾸며질 수 있었다.


 대통령이 유언에서 밝힌 ‘아주 작은 비석 하나의 정신’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유언은 세상을 떠나는 이의 겸양일 뿐이므로 아주 작은 비석은 국민들의 추모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추모공간이 되어야 마땅했다. 그래서 유골을 안장해 묘소를 만들되 봉분 대신 고인돌 같은 너럭바위 하나를 올려놓고 비석은 따로 세우지 않고 너럭바위에 비명을 새겨 그것이 비석이 되도록 했다. 유 청장의 아이디어였다. 황지우 시인은 묘역 바닥에 갈 박석에 추모글귀를 받으면 그보다 더 좋은 비문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안장식은 2009년 7월 10일에 엄수되었다. 유골은 백자 도자기와 연꽃 석함에 넣어져 안장되었다. 부장품으로는 참여정부 5년의 기록이란 5부작 다큐멘터리와 대통령 서거 후 추모인파를 촬영한 영상 DVD를 넣어드렸다. 역사가 참여정부를 평가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 토대가 될 다큐와, 당신이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아님을 증거 하는 추모영상을 하늘에서나마 보시라는 심정에서 그렇게 했다.


 안장식을 치른 뒤 1주기까지 약 10개월 동안은 묘역조성에 전력을 다했다. 1만 8천 명의 시민들이 저마다 추모의 글귀를 새간 박석을 묘역 주변에 깔았다. 건축가 승효상 씨의 구상이었다. 박석 배치는 미술가 임옥상 씨가 설계했다. 

 박석 모집이 시작되자 순식간에 희망자가 몰려 마감이 되자 미처 신청 못한 분들의 원성이 자자해 설계를 바꾸면서까지 박석 수를 늘렸다. 시민들이 새긴 추모문구는 한 줄 한 줄이 감동이었다. 황지우 시인의 말처럼 어디에서 이보다 더 나은 비문을 얻을 수 있을까. 


 나도 아내와 함께 박석 하나를 신청해 “편히 쉬십시오” 단 한 줄을 새겼다. 나는 그분이 대통령 재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게 한스러워 그야말로 안식을 바라는 마음 말고는 없었다.



 장례를 모두 마친 후 지속적인 추모기념사업을 위해 봉하엔 봉하재단을, 전국적으로는 노무현재단을 설립해 각각 감사직과 상임이사직을 맡았다. 확실하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응당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를 이야기한다. 고맙기만 하다. 하지만 아무리 대통령 서거에 대해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한단들 그분이 살아 계신 것만 할까. 가끔 꿈에서 대통령을 만나기도 한다. 술을 한 잔 마시면 가끔씩 옛날을 추억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인생에서 노무현은 무엇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내 인생을 굉장히 많이 규정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명적이다. 그것이 꼭 좋았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할 수 없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너무 많아서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와의 만남부터 오랜 동행, 이별은 내가 계획했던 것도 아니었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가 남긴 숙제가 있다면 그 시대적 소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물며 나는 더욱 그렇다. 기꺼이 끌어안고 남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28]

 길을 돌아보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참여정부 인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임기 내내 있는 힘을 다했다. 능력이 모자라거나 생각이 미치지 못한 점이 있었을지언정, 늘 열심이었고 사심이 없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과 우리는 실패한 대통령, 실패한 정부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차분한 성찰과 복기(復棋)가 필요하다. 냉정한 마음으로 성공과 좌절의 교훈을 얻어내야 한다. 또한 그러한 복기는 정권을 운용한 우리뿐 만이 아니라 범야권, 시민사회 진영, 노동운동 진영, 나아가 진보 개혁 진영 전체가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때는 모든 것을 ‘참여정부 탓’이나 ‘노무현 탓’으로 돌리고, 노 대통령 서거 이후에는 분위기가 반전 되었다고 성찰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2012년 대선을 앞둔 이 시점에서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2003년 참여정부 집권 시기에 비해 우리 진보 개혁진영의 역량과 집권능력은 얼마나 향상 되었을까. 진영 전체의 역량을 함께 모으는 지혜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나는 선뜻 긍정적인 답을 내놓기가 어렵다.

 우리 사회 밑바닥에 흐르는 도도한 보수적 풍토와 여론을 주도하는 강고한 보수 세력이 엄존하는 정치 지형 속에서 진보 개혁진영이 요구하는 수준의 ‘개혁’과 ‘복지국가’를 정권의 힘만으로 해낼 수는 없다는 사실 - 나는 이것이야말로 참여정부가 남긴 교훈이라 생각한다. 참여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좌 우 양쪽으로부터 부단한 공격을 받았다.

 내가 이 시점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보 개혁 진영 전체의 힘 모으기에 실패하면 어느 민주개혁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참여 정부 때 실패했던 개혁을 돌이켜 보면 이 사실은 명백해 진다. 국가보안법 철폐, 검찰 개혁,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 문제 등등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개혁들은 하나같이 실패로 귀착되었다.


 물론 개혁작업의 선두에서 정권을 운용했던 우리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보수적인 정치지형 속에서 기득권의 저항과 반대를 어떻게 극복하고, 국민의 지지와 동의를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이며, 정부는 어떻게 추진하고 시민사회진영은 어떻게 지원하면서 정부를 견인할 것인가, 수많은 개혁 과제들 가운데 우선순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시기별로 해야 할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이런 의제들에 대해 진보 개혁 진영은 얼마나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는가 하는 문제는 크나큰 아쉬움을 남긴다. 

 다 합쳐도 소수를 넘지 못하는 우리 진영은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으기는커녕 헤게모니 싸움 속에서 분열하지는 않았던가. 우리 진영의 근본주의가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영원한 소수파로 머물지 않으려면 국가 경영에 대해, 나아가 외교 안보문제에 대해서까지도 더 책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했던 것은 아닌가. 조직의 논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전략적 접근을 하지 못한 채 무리한 요구를 거듭함으로써 게도 구럭도 다 놓치는 우를 범한 것은 아닌가.

 이러한 반성의 토대 위에서 진보 개혁 진영의 모든 역량을 한 데 모아내기 위한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나는 통합이 바람직한 방안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집권 후를 생각하더라도 그렇다. 집권 후에도 함께 힘을 모아 개혁의 동력을 유지해 나가려면 단일화 보다는 더 놓은 차원의 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진보적 성향이 다수를 이뤄 진보 개혁 진영 안에서 헤게모니 싸움을 벌여도 대세를 그르치지 않게 될 때까지는 통합된 정당의 틀 안에서 정파 간의 연립정부를 운영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 29(마지막회)]

 운명이다


 중학교 1학년 여름, 어느 일요일 새벽 어머니가 나를 깨워 부산역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에 행여 작은 보탬이라도 될까 싶어 기차표 암표장사를 할 엄두를 내고는 나를 데리고 새벽 같이 길을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어머니는 역의 상황을 한동안 지켜보기만 했을 뿐, 시작도 하지 않고 그냥 발걸음을 돌리셨다. 아침때를 한참 넘긴 시간이어서 몹시 배가 고팠다. 우리 모자는 집 근처에 와서야 토마토 몇 개를 사서 겨우 요기를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일은 어머니와 나만 아는 일로 남았다. 나는 어머니가 왜 그냥 돌아왔는지도 몰랐고 더는 그 일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이번에 이 책을 쓰면서 어머니께 여쭤보았더니 어머니는 “듣던 거 하고 다르데”라고 짧게 대답하셨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그때 우리 모자 생각이 난다. 물론 우리는 이제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금도 지난 날 우리처럼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과거 어려웠던 시기를 견뎌내는 데는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국가가 가난해서 복지 기능을 제대로 못할 때는 민간이 나서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던 것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어려운 시기가 있을 수 있고 그럴 때 국가가 도와 어려움을 견뎌내게 하고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이것을 제대로 하는 것이 복지국가가 아닌가.

 나는 이런 복지국가의 꿈을 이루고 싶다. 그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국민과 더불어, 함께 하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표현한 그 정신과 가치는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정신의 축약된 표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치열했던 그는 서거조차 그러했으니, 나를 다시 그의 길로 이끌어 낸 것이나 다름이 없다. 노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 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다.  
 
-끝-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