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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전자는 왜 스마트폰경쟁에서 실패했나?

by 에비뉴엘 2013.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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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포춘코리아 2010년 11월호에 실린 'LG전자는 왜 실패했나' 기사입니다. 포춘 인터넷판은 지난 15일 'LG전자는 왜 스마트폰 경쟁에서 실패했나(How LG lost the smartphone race)'라는 제목으로 잡지 분량 9쪽에 달하는 이 기사의 전문을 영어로 번역해 전재했습니다.>



LG전자는 지금 최대 위기 상황이다. 적자를 기록했고, 신제품은 힘을 못 쓰고, 최고경영자는 퇴진했다. 아무리 위대한 기업이라도 힘든 시기를 겪게 마련이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짐 콜린스는 위대한 기업이 흔들리는 과정을 5단계로 구분했다. 성공에 따른 자만, 욕심, 위기의 부정, 다급한 구원 추구, 마지막으로 죽음이었다. 지난 3년을 돌아보면 LG전자 역시 몇 가지 단계의 주변을 서성였다. 왜 LG전자는 실패했나. LG전자는 다시 위대한 기업이 될 수 있을까.


2009년 2월 16일은 운명적인 날이었다. 남용(61) LG전자 부회장과 스티브 발머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만나 손을 꽉 잡았다. 바르셀로나에선 세계 최대 이동통신전시회인 모바일월드콩그레스 MWC 가 열리고 있었다. LG전자와 MS는 포괄적 사업협력 계약을 맺었다. LG전자는 MS의 윈도모바일 OS를 기반으로 2012년까지 50여 종의 스마트폰을 생산하기로 했다. 바르셀로나 카달루냐 플라자 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난 남용 부회장은 장담했다. “윈도 모바일 OS를 사용한 LG전자의 스마트폰은 급성장할 스마트폰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할 중심축이 될 겁니다.” 스티브 발머 최고경영자도 맞장구를 쳤다. “MS의 소프트웨어 기술과 LG전자의 휴대전화 하드웨어 기술력은 사용자들에게 놀라운 모바일 경험을 제공할 겁니다.”


세계 3위 휴대폰 생산자인 LG전자가 스마트폰 운영체제로 MS의 윈도모바일을 선택했단 소식은 MWC 2009에서 가장 의아한 뉴스였다. MS로서야 감사한 일이었다. 운영체제 시장의 주도권은 이제 PC에서 휴대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PC 운영체제 시장에 안주해온 MS는 휴대폰 시장에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애플과 구글한테 이미 주도권을 빼앗긴 처지였다. 그런데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모토로라의 덜미를 잡고 3위로 올라선 LG전자가 MS와 마주 앉았다. LG전자는 2008년 세계시장 점유율 8.6%를 기록하고 있었다.


LG전자의 전략적 판단에 대해 많은 의문 부호가 달렸다. MS의 윈도모바일 OS는 구글과 애플에 대항하느라 MS가 급조하다시피 한 운영체제였다. PC를 기반으로 한 윈도 OS를 크기만 줄여서 휴대폰에 꾸겨 넣은 탓에 느려 터져서 속만 터졌다. 윈도모바일 OS의 문제는 속도만이 아니었다. MWC 2009의 다른 한 편에선 스티브 발머 MS 최고경영자가 열심히 애플 앱스토어를 씹어댔다. 앱스토어의 상품성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었다. 애플이 앱스토어를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게 불만이었다. 발머는주장했다. “앱스토어는 오픈이 중요하다. 그건 기본이기 때문이다.” 당장윈도모바일 OS로는 애플 OS에 기반해 조성된 앱스토어의 애플리케이션생태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애플이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MS가 자력으로 애플을 따라잡긴 어려웠다. MS의 애플 발목 잡기였다. 스마트폰 열풍을 막 일으키면서 태풍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던 애플은 정작


전 세계 1,000여 개 휴대폰 관련 기업들이 참가하는 MWC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그때 전 세계 휴대폰 업계의 판도는 그랬다. 그런데도 떠오르던 실력자 LG전자는 지는 해인 MS를 선택했다.




스마트폰의 전신격인 PDA

우리나라에선 LG전자가 최초로 개발에 성공, '모빌리안'이란 제품명으로 1996년 8월에 출시되었다.

이메일과 팩스를 보낼 수 있었다.



LG의 여러 PDA폰들이 있었지만 2006년 2월에 출시한 KC8100 모델의 리모컨이 탐나 무척이나 사고싶었다. 

인텔CPU 520Mhz
램 64MB
2.4인치 240x240
200만화소 폰카
와이파이 지원
윈도모바일 5.0

1년뒤 2007년 8월 스티브잡스가 아이폰 1세대를 출시했다.


성공으로부터 자만심이 생겨나는 단계


그때 LG전자는 스마트폰 사업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MWC 2009에서 MS와 손을 잡으면서 LG전자는 애플은 고사하고 무서운 아이들인 구글과도 거리가 생겨버렸다. 2012년까지 윈도모바일 OS를 기반으로 한 스마트폰을 무더기로 만들겠다고 약속했지만, 정작 앱스토어도 없는 스마트폰의 태생적 한계에 대해선 해법이 없었다. 


LG전자의 전략적 착오는 또 있었다. 역시 MWC 2009에 참가한 LG전자 안승권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사업본부장은 “2009년 휴대폰의 핵심 트렌드는 사용자 환경 UI·User Interface”이라고 단언했다. UI란 무엇을 쓰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에 더 집중하는 분야다. 같은 기능을 써도 사용자가 좀 더 편리하게 쓰도록 만드는 게 목표기 때문이다. LG전자가 내놓았던 아레나폰이 대표적이었다. 아레나폰은 터치스크린을 활용하면서 기능 단추들이 3D 입체로 흐르도록 고안됐다. 터치스크린이 휴대폰 UI의 대세가 되고 있었다. LG전자는 한발 더 나아간 셈이었다. LG전자의 2009년 사업 전략은 좀 더 편리한 UI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됐다. 사용자에게 보다 편리한 쓰임새를 갖추는 방향으로 승부를 내겠다고 했으니 적극적인 마케팅 전술이 따라 붙는 것은 당연했다. LG전자는 상품 기획 인원을 대폭 늘려 잡겠다는 계획까지 내놓았다.


한쪽에선 이미 모토로라가 구글과 손잡고 안드로이드폰 '모토로이'를 내놓은 상황이었다. 모토로라는 세계시장에서 LG전자한테 덜미를 잡혔다. 사활을 걸고 구글과 함께 안드로이드폰을 개발했다. 국내시장에선 팬택 계열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팬택 계열 역시 구글 운영체제를 적용한 신형 스마트폰 개발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있었다. 모두가 LG전자의 등을 노리는 적군들이었다. 그들은 스마트폰 전환기야말로 전세를 역전할호기라고 봤다. 운영체제 시장에서 MS를 누른 구글의 탄력을 그대로 휴대폰 시장으로도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그런데 정작 LG전자는 보다 친절한 사용 환경과 좀 더 적극적인 마케팅을 강조하면서도, 시장에서 실패작으로 검증이 끝난 MS의 윈도모바일을 기반으로, 앱스토어도 없이, 3년이나 지난 뒤인 2012년에야 스마트폰이란 걸 좀 만들어보겠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적어도 2009년 한 해 동안에는 LG전자의 전략이 유효했다. LG전자는 2009년 목표 판매 대수를 1억 대로 잡았다. 전 세계 시장점유율은 두 자릿수를 기록하겠다고 했다. 남용 부회장의 LG전자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 1억 대 이상을 팔았고, 세계시장 점유율은 10.4%였다. LG전자가 세계 3위의 휴대폰 제조사가 된 배경에는 디자인의 힘이 컸다. 2005년 내놓은 초콜릿폰은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디자인 경쟁을 촉발시켰다. 명품 기업 프라다와 손잡고 프라다폰을 내놓자 뒤늦게 경쟁 휴대폰 제조사들도 앞다퉈 패션 디자이너들과 합작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가 내놓은 조르지오 아르마니폰도 LG전자의 프라다폰을 염두에 뒀다. LG전자는 분명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남용 부회장은 마케팅을 중시하는 전문 경영인이다. 마케팅은 일희일비하는 고객의 목소리를 그냥 흘려 듣지 않는다. 남용 부회장의 휴대폰 마케팅이 당장 소비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수 있는 디자인으로 흐른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배원복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장이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MC 사업본부의 디자인 전략을 이끌었다. 배원복 센터장은 MC 사업본부에서 CDMA 기술 전환을 주도하면서 사내외에 널리 알려진 휴대폰 상품 기획 전문가다. LG전자 MC사업본부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배원복 부사장이 디자인경영센터장에 포진해 있다는 점부터가 LG전자의 시장 전략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2009년 하반기 LG전자는 롤리팝이나 쿠키폰 같은 디자인 휴대폰으로 삼성전자와 치열한 추격전을 펼쳤다. 소녀시대와 빅뱅 같은 화려한 아이돌 스타들이 LG전자 휴대폰의 얼굴이 됐다.




원칙 없이 더 많은 욕심을 내는 단계


2009년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국내시장도 스마트폰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미 해외시장에선 애플의 공세 수위가 점점 더 높아지던 차였다. KT가 아이폰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삽시간에 한국 모바일시장도 UI 경쟁에서 스마트폰 경쟁으로 형세가 바뀌었다. 국내 소비자 시장에서 스마트폰 위기를 제대로 체감하기 시작한 건 그때가 돼서였다. 진짜 오판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LG전자는 여전히 변화의 속도를 간과했다. 보고도 보지 않으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LG전자 MC 사업본부 관계자는 말한다. “경영진이나 휴대폰 개발팀 모두 몰랐던 건 아닙니다. 다만 변화의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어요. 게다가 LG전자는 외형적으론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판매와 점유율에서 모두 MWC에서 공언했던 당해 연도 목표를 달성했죠. 환경이 변하고 있었다지만 그렇다고 딱히 문제가 된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부분이 있었죠.”


글로벌 금융위기가 눈을 가렸다. LG전자의 2009년도 매출은 56조 원에 달했다. 영업이익은 3조 원이었다. 사상 최고 실적이었다. 대견해할 만한 일이었다. 2008년도 하반기엔 MC사업본부뿐만 아니라 홈엔터테인먼트 사업본부와 에어컨디셔닝 사업본부까지 주요 사업본부의 매출이 추락하면서 내부적으로도 위기 의식이 팽배했다. 남용 부회장과 경영진이 당장 성과와 직결되는 마케팅과 디자인과 UI에 집중한 것도 금융위기로 줄어든 실적을 회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LG전자의 2009년 상반기 회복세는 눈부셨다. MC사업본부의 영업이익률은 2008년 말과 비교하면 두 배 넘게 향상됐다.


그러나 MC사업본부 안에선 또다시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2009년 3분기부터 MC사업본부의 매출과 영업이익률이 모두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바일 시장 판도를 분석하고 전망하는 ROA그룹은 이미 LG전자의 대응 속도가 기대보다 너무 느리다는 점을 지적했다. 휴대폰 경영 컨설팅 업계 관계자는 말한다. “홈엔터테인먼트 분야와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분야 모두 2009년 하반기부터 성장세가 둔화됐어요. 그런데도 LG전자는 2008년 말처럼 위기를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금융 위기를 무사히 넘기자마자 또다시 위기 경영을 한다는 게 부담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LG전자 MC사업본부 관계자는 말한다. “2009년 연말종무식이 기억납니다. 목표를 달성하긴 했지만 그렇게 시끌벅적하게 자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 이유가 휴대폰 시장이 급변하고,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고 느껴서가 아니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이었어요. 아직도 금융위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2010년에 대한 걱정이 앞섰던 거죠.” 그때 LG전자는 눈앞의 적은 보지 못한 채 멀리 있는 깃발만 걱정하고 있었던 셈이다.


▲2001년 1월, 독일 CeBIT 에서 애플보다 9년 먼저 선보인 타블렛제품

실제 이름이 아이패드이다.




위험과 위기 가능성을 부정하는 단계


LG전자 쪽에서 2010년 상반기는 좌절의 계절이었다. 스마트폰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시장을 재편해버렸다. 미리 준비했던 스마트한 기업들만 쾌재를 불렀다. 스마트폰 열풍의 종가인 애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만 HTC가 구글과 손잡고 안드로이드폰을 내놓으면서 시장점유율을 늘려 잡은 건 뼈아픈 일이었다. 모토로라 역시 모토로이로 만만치 않은 저력을 보여줬다. 그나마 호재가 있다면 애플처럼 하드웨어까지 넘보려고 했던 구글이 넥서스원 기획을 접은 일이었다. 적어도 구글은 애플에 대항하는 모든 휴대폰 제조사의 우군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LG전자는 끝까지 구글과 손잡는 데 인색했다.LG전자는 MS에 집착했다. LG전자는 2009년 2월의 언약을 믿었다. 하지만 MS 역시 제 코가 석자인 상황이었다. 윈도모바일을 대신할 신제품 출시 계획은 자꾸만 미뤄졌다. MS가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자 당장 LG전자가 피를 봤다. 이렇다 할 스마트폰 대응책을 내놓을 수 없었던 LG전자는 계속 피처폰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스마트폰의 대항마라며 하드웨어 수준만 잔뜩 높인 맥스폰을 내놓았다. 이미 2009년 하반기부터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뉴초콜릿폰을 내놓았다. 프라다폰2도 만들었다 모두 LG전자를 세계 3위 휴대폰 제조사로 끌어올린 인기작의 재판이었다. 역시 소프트웨어 없이 하드웨어로만 국면을 돌파해보려는 시도였다.


삼성전자와 비교됐다. LG전자와 마찬가지로 삼성전자 역시 처음엔 스마트폰 시장을 잘못 읽었다. 하지만 선수는 놓쳤어도 다음 수까지 놓치진 않았다. 2010년 상반기는 삼성전자의 1등 따라잡기 전략이 빛이 났던 시기다. 삼성전자 역시 LG전자처럼 하드웨어에서 우위를 갖고 있었다. 애플이 아무리 앱스토어를 강조한다고 해도 하드웨어를 모조리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삼성전자는 하드웨어 선두 기업으로서 유리한 조건을 유지하면서 모자란 부분을 조금씩 보완하기 시작했다. 일단 옴니아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불완전하지만 계속해서 시장에 삼성전자의 스마트폰을 선보인 게 주효했다.


익명을 요구한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관계자는 말한다. “회사에 입사한 뒤로 상반기만큼 바쁜 적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한편에선 계속 시장에 맞춰서 제품을 출시하고 다른 한편에선 삼성전자 스마트폰 전략에 따라 진짜 제품을 만드는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야 했어요.” 삼성전자 무선사업부가 자리한 수원 영통의 밤거리는 매일 야근을 끝내고 술 한잔하며 피로를 푸는 삼성전자 직원들로 불야성을 이뤘다. 따라잡을 수 없을만큼 선두와 격차가 벌어지지 않게 애쓰면서 자기 흐름을 가져가는 게 삼성전자의 전략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 회장으로 빨리 복귀하면서 리더십을 복원한 것도 주효했다. 스마트폰 열풍으로 삼성전자가 주도권을 잃어가는 시점에 등장한 오너 리더십이 조직을 추스린 결과였다.


반면에 2010년 상반기는 LG전자의 약웰옇彫떳?노출된 기간이었다. LG전자 MC사업본부 관계자는 말한다. “이제와서 얘기지만 상반기안에도 얼마든지 LG전자가 스마트폰을 시장에 출시할 수 있었어요. 삼성전자 갤럭시S 정도에는 절대로 뒤지지 않을 물건이었죠. 그런데 경영진에서 도통 만족하지 않는 겁니다.” 그는 덧붙였다. “사내에선 상반기에 스마트폰 주도권을 놓치고 시장을 잘못 읽은 걸 자인하는 셈이기 때문에 경영진이 자존심만 내세운다는 푸념마저 돌았죠.” LG그룹 안에서 MC 사업본부의 위상은 매우 높았다. 그룹 정기 인사 때마다 휴대폰 사업을 주도하는 MC사업본부 출신들이 승승장구했다. 내부적으로 실패를 인정하기가 그만큼 쉽지 않았다. 게다가 LG전자는 확실한 오너 리더십도 작동하지 않았다. 남용 부회장은 전형적인 관리형 전문 경영인이었다. 2009년 사업 전략을 성과와 마케팅 위주로 잡았던 것 역시 전문 경영인이라는 남용 부회장의 정체성이 묻어난 결과였다. 남용 부회장의 사무실은 경비 절감을 위한 아이디어만 만발했다. 낭비 제거 법, 고객 인사이트, 일 잘하는 일잘법 등등이었다. 하지만 일잘법만 해도 전화 통화를 하거나 출퇴근하는 시간을 아껴서 일에 집중하자는 얘기여서 창의적인 경영과는 거리가 있었다.


LG전자가 부랴부랴 옵티머스Q를 내놓는 데는 6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안드로이드 OS에 기반을 둔 제품이었다. 하지만 옵티머스Q는 삼성전자의 갤럭시S나 HTC의 인크레더블에 밀렸다. 같은 칩셋을 쓰는데도 경쟁사 제품은 안드로이드 OS 2.1 버전이었는데 옵티머스Q만 1.6버전이었다. LG전자는 나중에 무료로 업그레이드해주겠다는 생각이었다. 안드로이드 1.6버전만 해도 스마트폰으로선 충분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기준은 이미 2.1버전으로 넘어간 뒤였다. 제품 자체의 완성도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제품의 혁신성이 뒤처지는 것처럼 각인된다면 스마트폰 시장에서 버텨내기 어려웠다. 역시 LG전자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속도 문제는 상반기 내내 LG전자의 발목을 잡았다. 디자인과 UI 같은 품질 경쟁을 벌일 땐 LG전자의 의사 결정 구조와 문화가 빛을 발했다.


그러나 시장이 속도전으로 접어들자 LG전자는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를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가 속도다. 삼성전자는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바다 같은 자체 OS를 개발하면서 추격을 할 수 있었던 반면, LG전자는 빠른 추격을 하기에는 의사 결정과 방향 전환이 느렸다. LG전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꼭 외부에서 역량을 끌어와야 했지만, 삼성전자는 내부적으로 부품을 다 갖고 있어서 조립만 하면 되는 것도 차이다. 삼성전자는 선두에 나설 수 있는데도 보수적 조직 문화 때문에 앞서 나가기보단 반보 뒤에서 달리는 걸 선호한다. 반면에 LG전자는 실제로 추격자에 해당된다. 매번 흐름이 바뀌면 그때서야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LG전자의 느린 추격자 전략만 탓할 것도 아니다. 스마트폰 혁신은 하드웨어 중심의 휴대폰 시장이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변모하는 기술적 변화다. 그러나 정치적 변화로도 볼 수 있다. 휴대폰 제조사들과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자사의 이익에 따라 합종연횡하면서 전선을 형성해가는 외교전이다. 처음엔 PC시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애플과 MS의 대결처럼 그려졌다. 애플이 지나치게 빨리 성장하자 위기를 느낀 삼성전자나 노키아 같은 하드웨어 기업들이 반애플 전선을 형성하면서 연대했다. LG전자의 남용 부회장과 스티브 발머 MS 최고경영자가 악수를 나눈 것도 이무렵이었다. 그러나 전선은 또 달라졌다. 변수는 구글이었다. 구글이 자체개발한 휴대폰인 넥서스원을 포기하고 안드로이드 OS를 공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전선은 애플 대 구글의 모양새가 됐다. 기대를 모았던 MS가마땅한 대항마 OS를 내놓지 못한 틈을 구글이 치고 들어온 셈이었다. MS가 부진한 것도 구글이 기꺼이 넥서스원을 포기하는 이유가 됐다. 애플에 대항하는 다른 하드웨어 기업들은 모두 구글의 안드로이드 깃발 아래 뭉쳤다. 그러나 LG전자는 여전히 애플 대 MS의 구도로 시장을 바라봤다.


사실 애플 대 구글의 구도로 휴대폰 시장이 전환되면 LG전자나 삼성전자처럼 하드웨어 품질이 뛰어난 기업들은 오히려 유리했다. 소프트웨어가 구글로 통일된다면 다시 하드웨어 경쟁으로 시장이 흐를 테고 LG전자나 삼성전자한텐 유리한 상황이 된다. LG전자는 그걸 늦게 읽었다. 팬택 계열은 빨리 읽었지만 재원이 부족해서 욕심껏 내달리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먼저 읽은 덕분에 LG전자를 위협할 만큼 전세를 역전시켰다. 삼성전자는 빨리 읽은 데다 온갖 자원을 다 갖춘 덕분에 순식간에 갤럭시S로 구글 진영의 가장 중요한 휴대폰 제조사가 될 수 있었다. 외교전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애플은 여러 나라의 통신사 가운데 2위 기업들과 주로 손을 잡았다. 통신사와 휴대폰 제조사는 부부 사이다. 통신사가 필요한 제품을 제조사가 만들어주고 제조사가 필요한 환경을 통신사가 조성해준다. 


애플이 한국에서 KT와 손을 잡은 것도 같은 이유다. SKT는 이미 삼성전자와 공고한 관계를 맺고 있어 애플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KT는 지금도 와이파이존을 공격적으로 늘려잡으면서 아이폰을 위한 세상을 육성하고 있다. 그 구도 안에서 LG전자의 위치가 모호했다. 같은 LG그룹 계열사인 LG U+는 3위 통신사다. LG U+가 KT처럼 과감하게 아이폰을 들여올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 있다. LG전자 역시 과감하게 스마트폰으로 전환할 수가 없었다.


SK그룹이 진작에 스카이를 팬택계열로 넘긴것도 이런 이해상충을 예견해서였다. LG전자는 세계시장에서도 국내시장과 비슷한 처지였다. 반애플 진영의 하드웨어 공급자 자리는 삼성전자가 장악했다. 애플은 누구와도 손을 잡지 않는다. 남은 건 MS뿐이었다. 아쉬운 데로 MS에 기대를 걸고 기다린다면 MS가 전열을 정비해서 썩 괜찮은 아이폰의 대항마를 내놓았을 때 혜택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시가 급했다. 분기마다 비보가 전해졌다. 지난 9월 LG전자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20% 아래까지 급락했다. LG전자의 9월 내수 판매량은 35만7,000대 정도다. 당장 삼성전자의 갤럭시S와 애플 아이폰4에 밀린 결과다. 옵티머스Q가 신통치 않은 반응을 얻으면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LG전자는 2010년 3분기에 2,106억 원의 영업 적자를 기록할 걸로 전망됐다. 이 일은 남용 부회장의 경질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 남용 부회장은 임기를 3개월이나 남겨놓고 불명예 퇴진했다. 남용 부회장은 25년 동안 전자사업 분야에 몸담은 전문 경영인이다. 지난 9월 30일 남용 부회장은 직원들에게 남긴 고별사에서 이렇게 털어놨다.“LG전자가 부진을 보이기 시작한 때가 공교롭게도 지난해 사상 최고 실적을 거뒀다고 자랑하고 서로를 격려한 직후라서 더더욱 뼈아픕니다.”



▲2012년 1월 LG가 먼저 선보인 퀵윈도우, 뷰커버



구원을 찾아 헤매는 단계


“창업주의 손자를 CEO에 앉히는 조치가 LG전자를 구할 수 있을까?”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9월 23일자 기사에서 구본준(59) 신임 LG전자 부회장 인선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쏟아냈다. “LG를 회복시키는 일은 북한을 회생시키는 것만큼 힘든 작업은 아니지만 양측은 모두 권력 승계라는 까다로운 문제에 직면해 있다. 북한은 파산을 앞둔 소름끼치는 독재 국가인 반면 LG전자는 단지 어려운 시기에 봉착한 전자업체다. 그렇고 그런 옵티머스 시리즈를 내놨지만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이 지난해 말 10.7%에서 9%로 떨어졌다. 노키아는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핀란드인 경영진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MS 출신의 스티븐 엘롭을 사장으로 영입했지만, LG는 결국 재벌 창업주 일가인 구본준 LG상사 부회장을 선택했다.” 노키아가 외부 전문 경영인을 구조 대장으로 삼은 반면, LG전자는 내부 인물 가운데에서도 가장 안쪽에 자리한 창업주 가문 인물을 새 CEO로 선임했다는 것부터가 회의적이란 얘기였다.


한국 기업 문화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오너 경영은 그 자체만으로도 청신호다. 전문 경영인에 비해서 가까운 실적보다 장기적인 성과를 추구할 수 있다는 뻔한 장점도 있다. 책임 경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너경영이 기업 부활의 청신호인 진짜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어렵다고 오너가 복귀하는 게 아니다. 기업이 체력을 회복할 수 있으니까 복귀하는 것이다. 구본준 부회장이 LG전자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것부터가 이미 LG전자의 부활 로드맵이 짜여졌다는 의미다.


드디어 MS 윈도7 OS를 기반으로 한 옵티머스7이 출시되는 게 신호탄이다. MS의 부진은 LG전자의 부진으로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MS의 부활이 LG전자의 회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LG전자는 10월 21일부터 옵티머스7을 영국, 독일, 호주, 프랑스와 싱가포르에서 순차적으로 출시한다. 일단 하드웨어 사양은 남부러울 게 없다. MS는 이미 애플 앱스토어에 대항하는 윈도 마켓플레이스를 키워내고 있다. MS의 반격이 본격화될 2011년 상반기쯤 LG전자도 옵티머스7을 국내에 출시하고 한국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윈도폰 마케팅을 시작할 작정이다.


남용 부회장이 덕장이었다면 구본준 부회장은 용장으로 불린다. 구본준 부회장은 LG그룹 안에서 손꼽히는 전자통이다. 25년 동안 그룹 전자 계열사에서 일했다. LG디스플레이를 성장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신상필벌이 확실한 결과론적 경영인이다. 그동안 김쌍수 부회장과 남용 부회장 체제로 이어지면서 LG전자의 가장 큰 약점이 돼버린 속도를 보완할 수 있는 경영 방식이다. 


구본준 체제 인물들의 면면도 구체적이다. MC연구소장으로 있던 박종석 부사장은 MC사업본부장으로 임명됐다. 박종석 부사장은 위기에 강하다. 그룹 안에서 LCD에 등 떠밀리고 있던 PDP TV의 사업부장을 맡아서 PDP TV를 부활시켰다. 2008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08 가전 전시회에서 박종석 부사장은 엑스캔버스 보보스로 최고 혁신상을 수상했다.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당시 그룹 안에서 디스플레이의 달인으로 불리는 구본준 부회장조차 PDP를 사양산업이라고 봤을 정도였다. 또 그는 준비된 인물이다. MC 연구소장은 차기 MC사업본부장으로 직행하는 자리다. TV쪽에 집중한 탓에 휴대폰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박종석 부사장이 올해 초 MC연구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차기 수업을 받은 셈이다. 다만 2011년 초에나 있을 예정이었던 인사가 위기 상황에서 당겨진 것뿐이다.


위기의 진원인 MC사업본부뿐만 아니라 현재 유일한 버팀목인 홈엔터테인먼트 HE 사업본부를 이끌게 된 권희원 부사장 역시 LG전자 안에서는 가장 과감한 경영인으로 꼽힌다. LG전자 안에서도 가장 선도적인 분야로 꼽히는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만 잔뼈가 굵었다. LG전자 디스플레이 사업부장과 연구소장을 거쳤다. LG디스플레이와 LG전자 HE사업본부로 이어지는 LG전자의 TV 사업은 LG그룹 안에서도 추격자 전략을 전혀 쓰지 않는 분야였다. 이 분야에서 LG는 늘 선두에 있어왔다. 권희원 부사장은 쫓아가기보단 앞서나가려는 전자 경영인이다.


LG전자의 개편 인선은 추격자 전략 대신 과감한 탈추격 전략을 쓰겠다는 포석이다. 구본준 부회장부터가 LG그룹 안에서 탈추격 전략을 맨 처음 강조한 인물이다. LG디스플레이 사장 시절 구본준 부회장은 늘 “1등 합시다”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아예 LG디스플레이의 공식 인사말이 “1등 합시다”였다. LG그룹 전체의 2등 전략에 반기를 들었다. 명함에는 1등 회사, 1등 직원이란 표어를 새겨넣었다. LG디스플레이가 삼성전자를 제치고 LCD 분야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요인도 구본준 부회장의 탈추격 전략이 주효했다. 일단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다. 해외에선 MS 윈도7을 기반으로 한 옵티머스7을 중심으로 회생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국내에선 옵티머스원이 마침내 소비자들의 눈 안에 들었다. 앞서나간 덕분이다. 국내에서 출시된 스마트폰 가운데 구글 안드로이드2.2 버전을 탑재한 건 옵티머스원이 유일하다. 남들은 2.0 버전에서 놀 때 LG전자만 1.6 버전에서 헤매면서 뒤처졌던 상반기 때와는 대조적이다. 지난 10월 4일 출시된 옵티머스원은 하루 평균 2,000대가 넘게 판매되고 있다.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상반기 옵티머스Q가 외면당했던 걸 감안하면 가슴을 쓸어내릴 만하다. 이제야 LG전자가 속도를 내기 시작한 덕분이다.


LG전자는 소비자들이 앞으로도 튼튼하고 질 좋은 휴대폰을 찾을 거라고 봤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스마트하고, 튼튼하고 질 좋은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렸다. 기술 전환기에 예민하지 못했다. 매장 앞에 선 소비자들은0.1 버전의 차이만으로도 지갑을 열거나 안 열거나 할 수 있었다. 세상의트렌드에 과민한 한국 소비자들 사이에서 LG전자 휴대폰은 끊임없이 후순위로 밀렸다. 옵티머스Q의 실책은 LG전자의 약점을 드러냈다. 반면에옵티머스원과 옵티머스7에는 따라잡으면서 앞서가려는 LG전자의 추격과 탈추격 전략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구본준 부회장은 지난 10월 1일 취임사에서 “잠시만 방심해도 추월당할 수밖에 없는 냉혹한 게임의 법칙에서 LG전자의 위기가 비롯됐다”고 말했다. 또 “특히 휴대폰 사업에서 LG의 위상은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곧바로 LG전자를 마케팅 중심에서 기술 중심 기업으로 탈바꿈시키기 시작했다. 권희원 부사장과 박종석 부사장 모두 LG전자 내의 대표적인 공학도다. 변화는 시작됐다. 




불타는 승강장에서 살아남은 기업들


LG전자의 구본준 부회장, 박종석 MC사업본부장, 권희원 HE사업본부장 체제는 역대 LG전자 수뇌부 가운데 가장 공격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인화를 중시한다는 LG그룹 안에선 쉽게 찾아보기 힘든 인사다. 당연히 뒤를 이을 후속 인선에서도 혁신이 이어질 거란 전망이 나온다. 남용 부회장 시절 LG전자는 여러 명의 외국인 경영진을 영입했다. 글로벌 마케팅을 강화한다는 차원에서 이뤄진 조치였다. 연말 정기 인사에선 외국인 임원들에 대한 물갈이가 예고되고 있다. 젊은 임원들이 대거 등장할 가능성도 높다.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이 젊은 임원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하면서 세대 교체에 시동을 걸어놓은 상태다.삼성전자는 이미 올해 초 이건희 회장이 복귀하고 이윤우 사장이 물러나면서 최지성 단일 사장 체제로 전열을 정비했고, 내부적으로 몇 차례 파격 인사를 단행하면서 조직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유명 대학교 출신은 아니지만 휴대폰 전문가로 자타가 공인하는 직원을 팀장 임원으로 발령내면서 사내에 충격을 줬다. LG전자 역시 비슷한 혁신 조치가 이어질수도 있다. 무엇보다 구본준의 LG전자는 이제 1등이 목표다. 그걸 위해 LG디스플레이 시절처럼 탈추격 전략에 몰두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남영우 사장이 LG전자로 이동하면서 구본준 체제의 행보는 더욱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남영우 사장은 LG전자 아시아 지역 사업본부를 맡았다. 남영우 사장은 LG구조조정본부 전무 시절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기는 빅딜 협상을 주도했다. LG전자의 현재 양축은 휴대폰과 TV다. 사실 삼성전자처럼 반도체라는 삼각 편대가 있었다면 좀 더 공격적인 경영이 가능했다. LG전자의 근원적인 약점은 1999년 빅딜 때 생겼다. LG반도체 매각에 관여했던 남영우 사장이 LG전자로 이동하고, 구본준 부회장이 구원투수로 나서면서 매물로 나온 하이닉스 인수전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LG전자는 2009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사상 최대 실적을 자축했다. 그리고 불과 2년 뒤인 2010년 말 위기 상황을 맞아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그러나 2012년이 되면 하이닉스까지 거느린 삼각 편대로 변해있을지도 모른다. LG전자의 부활은 이제부터다. <포춘코리아 신기주기자>





그리고 이 기사가 정확히 3년이 지난 2013년...


▲2013년 8월 LG전자의 G2 스마트폰 출시

제로갭터치,듀얼라우팅,OIS카메라,노크온,하이파이 사운드,쿼드비트2 기술을 선보였다.


▲2013년 11월 세계최초 플렉시블 스마트폰 G FLEX

플라스틱 OLED, 스크래치 자동회복기능, 3500mAh 휘어진배터리 기술을 선보였다.



▲위 기사에 언급된 박종석 MC사업본부장은 3년뒤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LG전자는 2014년 또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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